흔히 야구를 굴곡많은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두산 베어스 정진호(29)는 지금까지 주연으로 조명을 받은 기억이 없다. 가능성을 인정받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주전 외야수의 뒤를 받히는 백업이었다. 막강 두산 외야진의 벽은 높고 높았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정진호가 극적인 드라마의 주역이었다.
정진호는 7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 2번-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1,2,3루타와 홈런을 때려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1회부터 화끈하게 터졌다. 1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좌익수쪽 2루타를 활짝 문을 열었다. 2회 2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맞은 두 번째 타석에서 우중 3루타를 때린 정진호는 4회 중전안타로 대기록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세 타석 모두 상대 투수는 우규민.
그리고 5회 2사 1루에서 4번째 타석에 섰다. 관중석이 살짝 들썩이더니, 잠시 후 묘한 긴장감이 환호성으로 변했다. 볼카운트 3B1S에서 바뀐 투수 최충연이 던진 높은 직구를 공략했는데, 타구가 쭉쭉 뻗어 오른쪽 담장 너머로 날아갔다. 호쾌한 홈런으로 사이클링 히트 완성.
5회, 4타석 만에 나온 대기록이다. 통산 23번째이자, 올 시즌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인데, 대기록이 하나 더 있다. 5회, 4타석 만의 사이클링 히트는 KBO리그 역대 최단 이닝 신기록이다. 정진호는 7회 다섯번째 타석에서 다시 좌전안타를 쳤다. 5타수 5안타 2타점 3득점. 물론 데뷔 첫 한 경기 5안타다.
역사가 만들어지려면 여러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우선 주전 외야수 박건우가 전날 선발 출전했다가 햄스트링 통증으로 교체됐다. 두산 코칭스태프는 트레이닝 파트 소견에 따라 박건우를 쉬게 하고 정진호를 선발로 내세웠다. 또 그동안 최주환이 주로 2번 타자 역할을 했는데, 타격감이 떨어져 정진호를 2번 타순에 넣었다. 코칭스태프의 결정이 대기록을 불러왔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날 정진호에게 자리를 내준 박건우는 지난해 6월 16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구단 사상 4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1년 만에 간접적으로 정진호의 대기록 달성에 기여한 셈이다.
정진호는 2015년 김태형 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 백업 외야수로 주목했던 선수다. 초반 여러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잘 맞은 타구가 워닝 트랙에서 잡히는 등 운이 따르지 않았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서 백업 경쟁에서도 밀렸고, 1,2군을 오르내렸다.
경기가 끝나고 만난 정진호는 "아직 실감이 안 난다. 간절한 마음으로 경기에 나섰는데, 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는 "5회 타석 때 홈런을 치면 사이클링 히트네 그런 생각을 했지만, 홈런은 생각도 못했다. 타구를 보면서 넘어가라 넘어가라 빌었다. 2군에 있다가 올라왔는데, 2군에 내려가기 싫다. 야구는 잠실에서 해야 재미있다"고 했다.
유신고-중앙대를 졸업한 프로 7년차 정진호. 앞으로 많은 팬들이 오랫동안 그를 기억할 것 같다.
잠실=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