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야구장 가는게 즐겁습니다."
6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 롯데 자이언츠의 새로운 '해결사'로 거듭난 정 훈(31)은 밝게 웃었다. 어느덧 프로 10년차를 넘긴 그는 여전히 더그아웃에서 백업 자원으로 분류된다. 내-외야을 오가는 '멀티플레이어'라는 꼬리표 역시 긍정과 부정의 시선이 오간다. 그러나 정 훈의 표정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경쟁'이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팀의 일원으로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끼는 모습었다.
롯데 팬들에게 정 훈의 이름은 낮설지 않다. 2010년 신고선수로 입단한 뒤 한때 2루수-중견수를 오가는 주전이었다. 타격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수비에서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주전 자리도 멀어졌다. 올해는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개막 한 달여 만인 지난달 29일 1군에 콜업됐다. 건재한 앤디 번즈와 신본기, 새롭게 합류한 민병헌, 이병규의 존재 탓에 정 훈이 올 시즌 주전 경쟁 전망은 불투명한 상황. 하지만 정 훈은 1군 콜업 당일 펼쳐진 한화 이글스전에 출전해 동점 희생 플라이를 친데 이어 3일 사직 KIA 타이거즈전에서 끝내기 2루타를 때려 '히어로'로 등극했다. SK 와이번스전에서도 4일 솔로 홈런, 5일 결승 득점 및 쐐기 적시타를 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조원우 롯데 감독은 "정 훈이 최근 좋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내-외야 멀티가 가능하고 대주자-타자로 나설때도 잘해줬다. 필요한 타이밍에 맞춰 쓸 것"이라고 호평했다.
정 훈은 "(3일 KIA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뒤 퓨처스(2군) 후배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축하한다'고 격려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마우면서도 '더 잘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주어진 기회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자는 생각이 컸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져 다행"이라고 최근의 활약을 자평했다.
든든한 가족도 숨은 힘이었다. 정 훈은 지난해 12월 동갑내기 신부 임온지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 3개월차 새신랑다운 '아내 자랑'이 쏟아졌다. "아내와 오랜기간 연애를 했다. (내가) 좋았을 때, 부진했을 때 모두 곁을 지켰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결같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요즘 아내가 '얼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가족의 힘'이란게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웃음)."
여전히 가슴 속엔 힘겨웠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다. 정 훈은 "지난 2~3년 동안 인터뷰 때마다 '내려놓았다'고 했는데, 사실 말만 그랬던 것 같다. 플레이는 더 위축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예전에 야구장에 출근할 때마다 '오늘은 어떻게 이겨내나'란 생각이 많았다"며 "돌아보면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다. (주전으로 뛰던) 좋았던 기억만 떠올랐다. 동료들을 보면서도 '저 자리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만 맴돌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고된 생활 끝에 찾아온 것은 깨달음이었다. 정 훈은 "최근 (김해) 상동구장(롯데 퓨처스 구장)에 가니 대부분이 후배더라.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스스로의 동기부여가 커졌다"며 "비록 퓨처스지만 꾸준히 기회를 받다보니 매 경기가 더 소중해졌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많아졌다. 어느새 마음이 편해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야구장으로 가는게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고 웃었다.
정 훈의 주전 경쟁 성패는 수비에 달려 있다. 뛰어난 타격 재능에도 수비 실수로 기회를 살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에 대해 정 훈은 "부진했던 점은 스스로 인정한다.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지적이고 내가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면서도 "부진에 얽매여 위축되는 것보다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즌 초반의 깜짝 활약은 언제든 잊혀질 수 있다. 정 훈 역시 욕심보다는 희망을 노래했다. "야구장에 가는게 즐거운 1년을 만들고 싶다. 하루를 '이겨낸다'가 아닌, '즐겁게 보내자'로 만들고 싶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