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체육교사로 거듭난 복싱인 김재훈
오래전 복싱 지도자로 입문한 이래 참으로 많은 복싱인과 교류하며 나름대로 인맥을 형성해 온 필자가 오늘 소개할 복싱인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서울 대진고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는 김재훈 선생이다. 그는 요즘 보기 드문 지덕체인을 겸비한 교육자이다. 김재훈은 축구인 차범근, 가수 조용필, 복서 홍수환, 음악가 홍난파 등이 나고 자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수원 삼일중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하다 삼일실고에 진학하면서 1m75의 신장으로는 대성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복싱으로 전환한다.
누가 말했던가.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고. 그해 학생선수권 웰터급에 출전한 김재훈은 2회전에서 천갑수(진주상고)에게 패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감지한 이의평 당시 서울체고 감독에게 발탁되어 1년 유급한 후 75년 두 번째 방향전환 끝에 서울체고에 입학, 본격적으로 복싱에 몰입한다. 늦더라도 올바른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전직 농구선수답게 복싱에 필요한 스피드와 순발력, 유연성 등을 고루 갖춘 김재훈은 졸업반인 77년 제1회 김명복박사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학생선수권 결승에서 정성용(양산종고)에게 접전 끝에 패했지만, 다시 한번 정상급 복서임을 검증받으며 값진 은메달을 획득한다. 이어진 전국체전에서 준결승까지 치고 올라간 김재훈은 영산포상고 황충재와의 대결에서 탱크처럼 밀고 들어갔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황충재와 치열한 타격전을 펼쳤지만, 근소한 차이로 고개를 숙인다. 승자 황충재가 위풍당당하게 한국체대로 진학하자 김재훈은 복싱계 명장 손영찬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부산 동아대에 입학한다. 김재훈은 78년 1월 서울역에서 동아대 입학 기념으로 감동의 이벤트를 준비한다. 서울역에서 동아대 정문까지 456.5km에 걸친 긴 레이스를 11박12일에 걸쳐 완주에 성공한 것이다. 철인도 아닌 평범한 복서 김재훈은 그야말로 악전고투 속에 레이스를 성공리에 마친 것이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한다'는 그의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목이다. 당시 그의 이 같은 감동적인 드라마는 4대 일간지에 기사로 실릴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3박4일간 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로 몸살을 앓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에 만족해했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재훈은 요추분리증이란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있었다. 척추의 마디와 마디가 떨어진 것으로 운동선수에겐 치명적인 장애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동아대에 입학한 김재훈은 1년 후 79년 건국대 사범대학 편입시험에 합격하며 또다시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해 제29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건국대 소속으로 출전하여 한국체대 천갑수에게 KO승을 거두며 대학부 웰터급 정상에 오른다. 일전에 한 번 패했던 천갑수와의 설욕을 겸한 승부였고, 고질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쟁취한 승리였기에 기쁨은 배가 되었다. 특히, 천갑수라는 복서는 국가대표 간판 조용래(경남대), 김주석(중앙대)과 승패를 주고받았던 베테랑 복서였기에 김재훈의 복서로서의 자질과 안정된 전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또다시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어차피 복서로 시작된 인생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순간에 화끈하게 타오르다 사라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80년 8월 홍수환의 소개로 서울 제기동에 있는 신도체육관(관장 조순현)에 입관, 험난한 프로 세계에 뛰어든 것이다. 6년 동안 아마복싱 67전 55승(46KO승) 12패의 전적을 뒤로하고. 홍수환과 트레이너로 호흡을 맞추면서 다채로운 기량을 전수한 김재훈은 4전 3승(3KO승) 1패를 기록하며 안정된 페이스를 유지했지만, 홍수환과 뜻하지 않게 결별한 이후 복싱계의 방랑자로 전락한다. 수업이 끝나면 그는 인근의 익수제약 체육관, 한국화장품 체육관 등을 전전하며 '동냥 스파링'을 하는 등 떠돌이 복서로 전락하며 단 9전 만에 은퇴한다.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82년 건국대를 졸업한 그는 도봉여중에 기간제 교사로 3년 동안 근무한 후 85년 사회에 뛰어든다. 그는 말대로 청부업과 사기 치는 일을 제외하곤 밑바닥부터 처절하게 부딪치며 살았다. 전신이 삶의 상처로 피고름이 흘러내려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하나로 버티고 감내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이 풍비박산 난 상태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현실의 절벽에서 '사즉생 생즉사'라는 배수진으로 무장했다. 그때 그는 시련과 아픔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해 나가는 성숙해진 사람만이 짙은 인생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으리란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진흙탕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연꽃이 피기를 기대하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86년 겨울 어느 날 도봉여중 제자로부터 대진고등학교 체육교사 채용시험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 소식은 컴컴한 암흑 속에서 솟아나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3개월 남짓 남은 기간 시험 준비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본시 기회란 녀석은 새색시처럼 슬그머니 왔다가 바람처럼 잽싸게 사라지기에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주경야독이 아닌 주독야독(?)으로 매달렸다. 82대1의 경쟁률이라는 숫자는 너무나 암담해서 차라리 삶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힘겨웠다. 그러나 그는 미친 듯이 몰입했고, 신들린 사람처럼 집중했다. '불성무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정성이 없으면 이뤄지는 것이 없다고. 만 30세에 그는 대진고 체육교사 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봄과 동시에 복싱으로 못 이룬 챔피언의 꿈을 학문으로써 이룬 것이다. 북풍한설 모진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추위에 떨어본 자만이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만끽할 수 있듯이 김재훈은 가장 중요한 승부처에서 극적인 한 방을 날리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 대목에선 복싱인의 한 사람으로 박수가 절로 나온다. 고진감래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싶다. 그에게서 빛이 나는 건 그가 바로 깊은 어둠을 지나온 까닭이다. 그는 3개월 질곡진 험난한 경험으로 인해 폭넓은 이해와 자신만의 인생관이 정립되어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온 밑거름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를 통해 느낀 점은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해보기나 했어?" 생전에 정주영 회장이 즐겨 쓰던 말이 생각나는 건 김재훈이 숱한 역경에 맞서 수시로 방향전환하면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철학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건국대 교육대학원 석사에 이어 2005년 동덕여대 대학원 체육학과를 졸업함으로써 아시아 최초로 선수 출신 박사 심판위원(당시 한국권투위원회)으로 기록됐다.
최초란 단어는 더없이 영광된 수식어다. 이를테면 최초의 학사 복서 송방헌(고려대 법대), 최초의 석사 여배우 윤정희 이런 식으로 불린다는 것은 상징성만으로도 영광의 금자탑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팔방미인이다. 2006년엔 대진고 농구부 감독을 맡아 제36회 추계전국남녀중고연맹전에서 창단 2년 만에 준우승으로 끌어올린 명장이기도 하다. 과학적인 데이터와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으로 개개인의 능력을 체크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는 정규수업이 끝나고 오후 3시 이후에 훈련을 시작했고, 욕설과 구타를 근절시키면서 유화적인 분위기 속에 팀을 정상권에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현재 프로복싱(KBF) 심판위원장을 겸직하면서 방송사 스포츠 해설위원, 부천대 생활스포츠과 겸임교수, 육군사관학교 복싱 감독을 역임했다. 그의 또 다른 자랑은 휘문고, 연세대를 거쳐 2017~18시즌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 전체 8순위로 KCC에 입단한 아들 진용 군이다. 아버지와 달리 2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김재훈처럼 맨손으로 시작하여 결실을 수확한 일종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략을 '무중생유 전략'이라 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길은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방법을 찾으면 길이 보인다는 뜻이다. 내가 처한 환경과 조건이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반드시 그 속에서 성공의 싹을 찾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요즘 세태에 더없이 중요한 교훈인 듯하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