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KBO(한국야구위원회)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가 논의했던 FA제도가 기로에 섰다. 상한제와 등급제. 전자는 구단들이 원하는 것, 후자는 선수협의 요구사항. KBO와 선수협은 수 년간 이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지만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최근 KBO는 FA상한제와 등급제, FA자격 취득연수 단축 등을 포함하는 개편안을 선수협에 전달했다.
선수협은 내부 논의를 거쳐 시간을 갖고 수용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내부 진통이 예상된다. 선수협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주장해온 FA등급제와 FA자격 획득 연수 단축은 당연히 환영이다. 하지만 상한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특급 FA가 될 가능성이 있는 소수 엘리트 선수들은 상한제에 극렬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 성적 기대치, 나이, 보상선수 때문에 발목이 잡힐 수 있는 준척급 또는 B급 FA 선수들은 내심 FA등급제에 기대를 걸 수 있다. 선수협은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조율해야 한다.
FA 몸값은 수 년간 천정부지로 치솟아 구단 살림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차적인 책임은 구단들에 있다. 자기들끼리 음으로 양으로 경쟁하다 지금에 이르렀다.
KBO는 의결권을 가진 10개 구단 사장단과 총재로 구성된 이사회가 거의 모든 안건을 결정한다. 구단주들과 총재의 모임인 총회는 정관 변경, 총재 선출, 회원사 자격의 취득과 변경 등 이른바 더 큰 사안만 결정한다. 리그 운영에 관한 한 이사회의 결정이 거의 모든 범위를 총괄한다. 이번 안건은 구단들이 논의 끝에 내린 합의안이다. 선수협과의 논의를 통해 일정 부분 조율할 수 있지만 큰 틀은 유지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이사회와 KBO 사무국이 결론에 이른 FA상한액은 4년간 80억원이다. 여기에 선수들이 아주 싫어할 계약금 제한(최대 30% 수준)까지 포함됐다는 후문이다. FA 몸값 중 계약금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는 추세다. 절반을 넘을 때도 있다. 일시에 목돈을 쥐고 싶어하는 선수들의 바람 때문이었다. 같은 몸값 규모라도 대어급은 계약금이 많냐, 적냐에 따라 구단 선택지가 달라졌다.
100억원을 돌파할 수있는 대어급 선수는 시장 상황에 따라 연간 2~4명 정도로 예상된다. 역대 최고액인 이대호(롯데 자이언츠, 4년 150억원)는 해외 유턴파라는 무형의 플러스 요인이 가미됐다. 역대 FA가운데 4년 80억원을 넘긴 선수는 모두 13명이었다. 100억원 마지노선은 2016년말 최형우(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가 가장 먼저 깨뜨렸다. 유턴파 김현수는 지난해말 LG 트윈스와 115억원에 도장을 찍었다. 상한선은 계속 뚫리고 있던 참이었다. 당장 올해말 두산 베어스 양의지의 경우 100억원 돌파는 기정사실이었다. 이는 원소속팀 두산 베어스도 충분히 고려할 수 밖에 없었던 액수였다.
선수협이 소수의 권리를 제한하고 좀더 많은 선수들을 위해 상한제와 등급제를 동시에 품을 때도 부작용은 있다. 상한제가 도입되면 나머지 준척급, B급 FA들의 몸값도 자동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번 논의가 최종 타결돼 양의지가 4년간 80억원을 받는다면 웬만한 FA들은 알아서 몸값을 대폭 낮출 수 밖에 없다. 이른바 하향 평준화다. 선수들 입장에서도 상한제가 동반된다면 등급제를 마냥 반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FA뒷돈 논란도 상한제가 일시에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 손에 떨어지는 돈은 더 적어진다. '신인지명권 박탈과 10억원 벌금'으로 제재를 강화하면 구단들이 섣불리 규정을 어기기 쉽지 않다. 십 수년간 시행되던 구단별 메리트 제도(승리수당)는 강력한 벌금 공표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차피 구단들은 지출을 줄이고 싶은데 경쟁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지갑을 열어 왔다. 옆집이 안한다면 나서서 돈을 더줄 이유가 없다.
그나마 FA자격 취득 연수 단축(고졸 9년→8년, 대졸 8년→7년)이 이번 FA 상한제-등급제 협상에 기름칠을 할 것으로 보인다.
10개 구단과 KBO가 서둘러 상한제 카드를 들고 나온 이유는 올해 개막부터 본격 시행중인 대리인 제도(에이전트) 때문이다. 두 차례의 KBO 공인 에이전트 시험(선수협 주관)을 통해 160명 이상의 공인 에이전트들이 자격증을 획득했다. 에이전트들은 선수들과의 계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웬만한 주전급 선수들은 계약을 마친 상태다. 구단들은 대리인들의 활발한 협상력에 잔뜩 긴장한 상태다. 시장논리에 역행한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상한제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박재호 기자 jh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