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연극 무대로 시작해 스크린, 안방을 오가며 열심히 달려온 28년이다. 오랜 무명 시절을 버티며 갈고 닦은 결과 투박하지만 견고한, 그리고 단단한 무쇠 같은 내공을 갖게 된 배우 이정은(49). 올해, 청룡의 무대에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2019년은 이정은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한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잊지 못할 해가 됐다. 단연 '이정은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지난 2월 방영된 JTBC '눈이 부시게', 8월 방영된 OCN '타인은 지옥이다', 최근 종영한 KBS2 '동백꽃 필 무렵',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5월 전 세계 씨네필을 사로잡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까지 4연타 흥행 불패 신화를 이뤄낸 이정은이다.
특히 한국 영화 100년 역사 최초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역사를 쓴 '기생충'에서 폭발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이정은은 지난달 열린 제40회 청룡영화상에서 의미 있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2019년을 화려하게 마무리 지었다.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2008년 창작 뮤지컬 '빨래'에 합류해 입지를 다진 뒤 2000년 영화 '불후의 명작'(심광진 감독)으로 스크린에 진출, '마더'(09, 봉준호 감독) '변호인'(13, 양우석 감독) '검사외전'(16, 이일형 감독) '곡성'(16, 나홍진 감독) '보안관'(17, 김형주 감독) '옥자'(17, 봉준호 감독) '군함도'(17, 류승완 감독) '택시운전사'(17, 장훈 감독) '미쓰백'(18, 이지원 감독) '말모이'(19, 엄유나 감독) '미성년'(19, 김윤석 감독) '기생충'까지 28년간 다양한 작품,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쉼 없이 달렸다. 그리고 올해 청룡영화상을 통해 노력을 인정받았다.
청룡영화상이 끝난 뒤 지난 2일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이정은은 "청룡영화상이 끝난 뒤 너무 고마운 분들의 카톡(카카오톡)이 몇백 개씩 와 있더라. 청룡영화상이 굉장히 파급력이 크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평소 카톡이 하루에 10개도 채 안 오는데…, 내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나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됐다. 수상하고 2주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고마운 분을 찾아뵙기도 하고 주변에 인사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아직도 믿기지 않고 주변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정은은 여우조연상 수상 당시 무대에 올라 "'기생충'으로 너무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니까 약간 겁이 났다. 그래서 다른 작품에 몰입하고자 서울에서 벗어나 있으려고 했다. 내 마음이 혹시나 자만할까 싶어 두려웠다. 그런데 이 상을 받고 나니까 며칠은 쉬어도 될 것 같다"며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너무 늦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친 것 같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스스로는 이만한 얼굴이나 몸매가 될 때까지 분명히 그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보는 이들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 이정은의 뭉클한 청룡영화상 수상 소감이었다.
그는 "청룡영화상 무대에 올랐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주변에 수상 소감도 화제가 많이 됐다고 하더라. 뒤늦게 집에서 청룡영화상 재방송을 봤는데 내 모습을 보는데 너무 부끄럽고 쑥스럽더라. 멋있게 또 쿨하게 수상 소감을 하고 싶었는데 절대 그게 안 되더라. 내 모습을 보면서 많이 웃었다"며 "사실 청룡영화상 수상 이후에 '기생충'을 함께한 이선균을 만났다. 내 소감을 특히 더 공감하더라. 이선균 역시 나와 비슷한 기분을 갖고 있었다. 내가 참여한 작품이 대외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면 다음 작품을 할 때 하중이나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새 작품에 들어갈 때 '기생충'과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게 됐고 또 현재의 작품에 최대한 입수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고 했다. 그런 부분이 정말 공감됐고 내 수상 소감도 그런 의미에서 하게 된 말인 것 같다. '기생충' 이후 '내가 죽던 날'(박지완 감독), '자산어보'(이준익 감독),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까지 이어갔다. 김혜수, 설경구 선배와 마지막 파티조차 못 하고 다른 작품을 계속 이동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뭘 향해 달려가고 있나' 싶은 순간이 찾아왔는데 청룡영화상 수상을 한 뒤 문득 뒤를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1년간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도, 스태프들도 생각나면서 참 많이 울컥했던 것 같다"고 의미를 다졌다.
데뷔 28년 만에 첫 청룡영화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여기에 수상까지 거머쥔 이정은에게 청룡영화상은 보상, 적금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삶에 큰 위로와 원동력이 됐다고. 이정은은 "내게 여우조연상은 '그동안 참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라며 위로해준 것 같았다. 무대에 오르니까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때마침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공효진) 엄마를 끝낸 시점이라 드라마 속 대사가 많이 기억이 났다. '인생이 너무 힘들었어'라는 대사가 참 많이 생각났다. 또 동백이 엄마는 나의 삶과 너무 다른 삶이었고 인물이지만 동백이 엄마가 동백이를 보면서 느낀 것처럼 '적금 탄 것 같다'라는 말이 떠오르더라. 열심히 농사짓고 수확했는데 그 수확이 풍년인 것 뿐만이 아니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고 정거장에서 시원한 음료수와 맛난 빵까지 먹게 된 것 같았다. 이제 다음 작품 들어갈 때까지는 모처럼 맘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었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