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기생충'이 받을 줄 몰랐어요. 그런데 솔직히 나도 모르게 조금 욕심이 걸쳐 있더라고요. 하하."
제40회 청룡영화상 최고의 유행어는 뭐니 뭐니 해도 "'기생충'이 받을줄 알았는데…"라는 수상 코멘트였다. 한국 영화 최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유력한 수상작이었으며 후보들에겐 강력한 경쟁상대였기 때문. 더구나 올해 여우조연상은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결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변 없이, 그리고 이견 없이 여우조연상은 배우 이정은(49)에게 돌아갔고 모두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기생충'은 전원 백수인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박사장(이선균)네 과외선생 면접을 보러 가면서 시작되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따라가는 이야기를 그린 가족희비극이다. 올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 관객에게 명작으로 꼽힌 '기생충'에서 이정은은 그야말로 독보적, 압도적인 캐릭터를 완벽히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극 중 박사장네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을 맡은 이정은은 영화 초반 박사장의 아내이자 저택의 안주인 연교(조여정)와 케미스트리를 발휘하다가 중반부 극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흔드는, 충격의 반전을 일으키는 키 플레이어로 영화를 이끌며 '미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올해 스크린에서 가장 빛났던 최고의 신 스틸러이자 최고의 캐릭터로 등극한 이정은은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통해 다시 한번 명품 연기를 인정받았다.
이정은은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 촬영 전 문광 캐릭터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봉 감독이 처음 보여준 콘티가 있는데 그 콘티가 바로 문광이 지하실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었다. 문광이 지하실 문을 몸으로 미는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왔다. 문광이라는 이름만으로 나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듣자마자 이름부터 너무 좋았다. 문광이라는 이름이 뭔가 우직하기도 하면서 께름칙한 느낌을 주지 않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중에 봉 감독에게 '이름이 너무 좋다'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느낌이 잘 될 촉이었을까"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의 이정은은, 그리고 '기생충'의 문광을 만들어준 봉준호 감독. 이정은과 봉준호 감독과 인연은 '마더' 때부터 시작됐다. '마더'에서 죽은 아정의 친척으로 등장한 그는 화장터에서 상복을 입은 안경 쓴 중년 여성으로 변신해 도준 모(김혜자)의 멱살을 잡는 장면 하나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옥자'에서는 슈퍼돼지 옥자의 목소리를 연기, 명실상부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등극했다.
이정은은 "사실 내겐 봉 감독은 어려운 사람이다. 감독과 배우의 사이이니까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관계다. '기생충'까지 세 작품 호흡을 맞췄지만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이다. 어떨 때 가끔 서로의 반려견 사진을 교환할 뿐이다. 봉 감독 성향 자체가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사근사근 묻는 편도 아니고 늘 언제나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어떤 스토리, 어떤 장면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영화 추천 등에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마더'를 찍고 난 뒤였을까? 한 번은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많이 먹고 동년배인 봉 감독에게 '우리는 친구야'라고 했다가 술 깨고 난 뒤 엄청 후회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바로 '감독님,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이전과 같은 모드로 돌아갔다"고 웃픈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는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늘 볼 때마다 봉 감독은 존경스럽다. 천재적인 사람인데 그만큼 노력도 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굉장히 예의가 바르고 선배들에게도 잘한다.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를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이며 배우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는 감독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저절로 춤을 추게 만드는 마법사 같은 감독이다"며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서로에게 낯부끄럽고 살가운 축하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봉 감독은 '문괭~, 축하해요'라며 애칭을 불러주더라. 봉 감독은 늘 나를 '문괭~'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준다. 늘 감사하고 그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덧붙였다.
이렇듯 올해 봉준호 감독과 함께 칸, 청룡의 무대를 달구게 된 이정은. 그렇다면 과연 그는 자신의 수상을 예측했을까. 유행어처럼 '기생충'이 받을 줄 알았던 것일까. 이정은은 "청룡영화상 당일 함께 후보에 오른 후보군의 자리를 쓱 보게 됐다. 솔직하게 내가 생각한 유력 수상자는 '벌새'(김보라 감독)의 김새벽이었다. 이미 해외 영화제에서도 상을 많이 받았고 특히 김새벽은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친구이지 않나? 또 이하늬도 내 마음속 유력한 후보였다. '극한직업'(이병헌 감독)을 너무 재미있게 봤다. 김새벽과 이하늬가 서로 각축을 벌이겠다 여겼는데 웬걸, 내가 받게 됐다"고 답했다.
이어 "물론 나도 수상 욕심이 조금은 걸쳐 있었다. 사람이란 게 정말 욕심이 끝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는 더 못 받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연이라는 역할이 너무 좋다. 주연은 책임도 크고 여러모로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파트가 모인다는 의미에서 주연, 조연의 개념이 앞으로는 점점 사라질 것이고 주연이 조연이 되고 조연이 주연이 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조연으로 불리는 것 자체가 너무 좋다. 그동안 큰 욕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내가 원하는 파트에서 상을 받고 나니 너무 기쁘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이정은은 "남들이 들으면 상을 타서 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스스로는 배역이라는 게 운명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배역을 맡느냐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기생충'은 봉 감독의 큰 계획 아래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런 기회가 내겐 운이었던 것 같다. 별 계획은 없었는데 이렇게 좋은 상까지 받게 돼 개인적으로 뿌듯하다"며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기보다는 이때까지 쌓아온 나에게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해 가라는 좋은 위로와 응원을 해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서는 한국 영화가 100년이 된 시점에 커다란 변화도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조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여성들의 역할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앞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받을 후보들은 더 다양하고 다재다능한, 물론 나 같은 중년 배우도 많이 조명될 것이라고 믿는다. 올해 50세인데 내 인생에서 확실히 중요한 의미를 전했다"고 곱씹었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