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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로가 2명이나 있는데, '대문자 L' 조끼 긴급투입? V리그 규정 살펴보니…13년만의 챔프전 연출한 '신의한수' [수원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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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 배구에는 리베로라는 특수 포지션이 있다. 전위에 설 수 없고, 공격도 할 수 없는 '수비 전문 선수'다. V리그의 리베로는 확실히 눈에 띄도록, 다른 유니폼을 입는다.

그런데 유니폼이 아니라 동호인 배구에서나 볼 법한 '리베로 조끼'가 프로 경기에 등장했다. 29일 수원 실내체육관. 도드람 2024~2025시즌 V리그 여자부 플레이오프 3차전 정관장과 현대건설전.

이날의 승자는 정관장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흥국생명과 겨루는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확정지었다.

정관장은 현재 '부상병동'이다. 주전 세터 염혜선, 외국인 선수 부키리치, 미들블로커 박은진, 리베로 노란까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림꾼 염혜선은 무릎 통증이 악화돼 2차전을 결장했다. 붓기도 통증도 남아있지만, 마지막에 몰린 팀 상황상 염혜선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었다. 부키리치 역시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할 뿐이다.

"일단 메가가 살려면 (염)혜선이가 있어야 한다. 메가에게도 '혜선이 덕분에 네가 잘하는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이날 메가의 공격 점유율은 45%를 넘어섰다. 고희진 감독은 2세트 경기가 기울자 일찌감치 주전 선수들을 빼며 체력 관리도 했다.

이날 단연 눈에 띈 장면은 박혜민의 리베로 투입이었다. 노란이 먼저 선발출전 했지만, 2세트 도중 통증을 호소하며 빠졌다.

제2리베로 최효서가 투입됐지만, 경험이 부족한 최효서는 현대건설 김다인에게 연속 서브에이스를 허용하는 등 크게 흔들렸다. 작전타임을 부른 고희진 감독이 최효서에게 "(웜업존 선수들과)한 바퀴 뛰고 와!"라며 역정을 내는 모습도 포착됐다.

고희진 감독에 따르면 최효서는 심리적 부담에 과호흡 증상까지 보였다. 결국 고희진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리베로 재지명' 규정을 활용해 박혜민을 새로운 리베로로 지명했다. 박혜민은 '대문자 L'이 쓰여진 큼지막한 파란색 조끼를 입고 출전했다.

한국배구연맹(KOVO) 배구 규칙 19조 4항에는 '리베로 재지명'에 대한 규정이 있다.

'리베로가 부상을 입었거나 질병, 퇴장, 또는 자격박탈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는 경우, 감독 또는 감독 부재시 주장은 어떠한 이유로든 리베로가 경기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다. 재지명 순간 코트에 있지 않은 선수들 중 한 명을 남은 경기의 새로운 리베로로 재지명할 수 있다.'

일단 세트 도중 로테이션을 위해 교체될 수는 있지만, 규정상 리베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리베로 재지명은 기존 리베로가 부상, 퇴장 등의 이유로 모두 경기에서 뛸 수 없는 경우에 대한 규정이다. 단 '리베로 재지명'이 이뤄질 경우, 기존 리베로는 더 이상 해당 경기에 복귀할 수 없다.

정관장은 노란, 최효서가 모두 부상으로 뛸 수 없다며 리베로 교체를 심판에게 요청했고, 심판은 두 선수의 엔트리 제외 및 박혜민의 재지명을 받아들였다. 말 그대로 승부수였다. 만약 박혜민마저 무너질 경우, 노란이나 최효서의 재출전은 불가능하기 때문.

기존 리베로에겐 자칫 트라우마가 될수도 있는 결정. 하지만 챔피언결정전 진출 여부가 달린 플레이오프 3차전이었다. 염혜선과 마찬가지로 선수의 사정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과감한 결단. 신의 한수가 됐다. 박혜민은 3~4세트 안정된 리시브를 뽐내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프로 8년차 경력이 헛된 게 아님을 증명했다.

경기 후 평소와 다르게 눈가가 촉촉해진 채 브리핑룸에 들어온 고희진 감독은 "우리 선수들의 투혼에 눈물이 났다. 아직 한국 여자배구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 경기"라고 돌아봤다.

"정관장은 최효서 한명을 위한 팀이 아니고, 난 정관장이란 팀을 이끌어야하는 입장이다. (차후)일단 노란의 상태를 보고, 최효서도 더 연습을 시켜보고, 정 안되면 계속 박혜민으로 갈수도 있다. 박혜민에게 고맙고, 최효서도 이겨냈으면 좋겠다. 그게 프로 아닌가."

1m81의 박혜민은 여자배구에서는 장신에 속한다. 무난한 수비와 사이드블로커로서의 높이에 초점이 맞춰진 선수다.

올시즌 정관장에선 많은 출전시간을 갖지 못했다. 부키리치-표승주의 주전 아웃사이드히터진이 탄탄하고, 패기 넘치는 전다빈, 서브가 좋은 신은지, 큰 키에 파워가 좋은 이선우 등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나누고 있기 때문. 그런데 뜻밖의 기회를 잡았다.

경기 후 만난 박혜민은 "리베로 유니폼도 없는데 준비하라고 하시니 당황했다. 그럴 때를 위해 준비된 조끼가 있더라"라며 당황스러웠던 심경을 고백했다. 이어 "(최)효서보다 경험이 많은 점을 믿어주신 거 같다. 열심히 파이팅 외치고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간의 내 노력을 믿었다"고 덧붙였다.

박혜민으로선 GS칼텍스 시절 이후 두번째 챔프전 진출이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짜릿하고 재미있다. 그땐 어렸고 지금은 경험이 쌓여서 아닐까. 오늘 우리 선수들은 살짝 돌아있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챔프전 상대는 흥국생명. 김연경의 화려한 라스트댄스를 기대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정관장은 의도치 않게 악역이 됐다.

염혜선은 "올해 정말 행복하다. 이만큼 좋은 멤버로 또 언제 챔프전을 치를 수 있을지 모른다. 꼭 우승 트로피를 들고 싶다"면서 "드라마 보면 악역이 독하지 않나. 독한 악역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메가는 "한국 드라마는 주로 행복한 로맨틱코미디나 멜로물을 많이 본다"며 "이번 시즌을 행복하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거들었다.

수원=김영록 기자 lunarfl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