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4·3기록물 '진실을 밝히다 : 제주4·3 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4·3의 기록은 고통의 기록이자, 화해와 상생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70여년 전 치열한 이념 격돌의 한가운데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된 고통의 역사지만, 그 아픔을 딛고 진실을 규명하고 끝내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는 현재 진행형의 기록이다.
문학작품으로는 유일하게 4·3기록물에 포함된 작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제주4·3을 들여다본다.
◇ 금기를 깨고 4·3을 폭로하다 '순이삼촌'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중략) 세월이 삼십년이니 이제 괴로운 기억을 잊고 지낼 만도 하건만 고향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잊힐까 봐 제삿날마다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때 일을 명심해두는 것이었다.'(순이삼촌, 창비 60, 62쪽)
제주4·3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렇기에 4·3은 금기(禁忌)였다.
권력은 기나긴 침묵을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강요했다.
그저 제삿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당시를 떠올리고, 숨죽여 죽은 이들을 애도할 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소설 '순이삼촌'은 이처럼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순이삼촌, 창비 85∼86쪽)
하지만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은 금기를 깨고 군부독재 시기인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소설을 발표했다.
제주에서도 가족들에게만 은밀히 할 수밖에 없던 이야기를 문학의 힘을 빌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터뜨린 것이다.
1949년 1월 17일 진압군에 의해 마을주민 300여명이 희생된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집단학살 사건을 통해 제주 섬 전체에서 벌어진 만행을 폭로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2천762일간 제주에서 적게는 1만4천여명, 많게는 3만명이 숨졌다.
'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중략)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순이삼촌, 창비 71쪽)
폭로의 대가는 혹독했다.
현기영은 소설을 쓴 탓에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순이삼촌'을 계기로 대학가와 지식인들이 4·3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문화계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순이삼촌'은 문학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4·3기록물에 포함됐다.
현기영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4·3을 이야기하지 않고선 문학적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겠다는 딜레마를 느꼈다. 4·3을 쓰고 싶었다기보다 의무감, 부채감이 무겁게 억눌렀다"고 '순이삼촌'을 쓰게 된 배경을 털어놓았다.
이어 "제주 4·3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 작별하지 않을 기록 '4·3' 세계에…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중략)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9쪽)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문학동네)는 4·3을 영원히 작별하지 않을 역사의 기록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
소설은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제주도 빈집에 내려가서 인선 어머니가 겪은 아픈 기억을 되짚는다.
4·3 당시 가족 대부분을 잃고, 타지역으로 끌려가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한 인선 어머니인 정심의 길고 외로운 싸움과 고통의 시간이 담겼다.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살 이모만 당숙네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중략)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84쪽)
오빠는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수형인(受刑人, 형벌을 받은 사람) 신분이 됐다.
4·3 당시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간 사람들은 1948∼1949년 사이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간첩 또는 이적행위) 등 억울한 누명을 썼다. 이들은 불법 군사재판 또는 일반재판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 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거나 형량을 선고받고 오랜 기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른바 '4·3 수형인'이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이를 미리 체포하는 일)이란 미명아래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결국 행방불명된 사람이라는 말이 보태져 '4·3 행불인 수형자'가 됐다.
'외증조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1960년 2월이었어, 인선이 말한다. 그때 엄마는 스물다섯 살이었어. 당시로선 한참 혼기를 넘겨서 모두 걱정했지만 엄마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어. 시집갈 때까지 염려 말고 지내도 좋다고 외가에서 말했지만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이 집을 샀고, 계속 혼자 농사를 지었어. 그러다 여름부터 유해를 찾기 시작한 거야. (중략) 결국 엄마는 실패했어.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인선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뼈를 찾지 못했어. 단 한 조각도.'(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80, 286쪽)
한강은 지난해 12월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설에 대해 강연했다.
그는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강은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되뇌며 소설의 말미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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