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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기록 4·3] '억압된 기억'과 '화해와 상생'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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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인 명부, 형무소에서 온 엽서, 4·3 피해신고서, 영모원 비문 등 목록에

(제주=연합뉴스) 전지혜 기자 = '1만4천673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최종 등재된 4·3 기록물 '진실을 밝히다: 제주4·3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에 담긴 각종 기록물의 수다.
4·3으로 인한 아픔과 이를 극복해 나가는 진상규명 운동의 과정을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여기에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진 희생자와 유족들의 증언, 도민과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진상규명 운동, 그리고 결국 2003년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억압된 기억에 대한 기록'들이 담겼다.
이후 가해자였던 사람들을 포용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한 '화해와 상생의 기록'도 포함됐다.
구체적으로는 문서 1만3천976건, 도서 19건, 엽서 25건, 소책자 20건, 비문 1건, 비디오 538건, 오디오 94건이다.
희생자·유족 증언 기록이 1만4천601건으로 가장 많으며 군법회의 수형인 기록이 27건, 진상규명과 화해를 위한 시민운동 기록이 42건, 정부 진상조사 관련 기록이 3건이다.
이 중 주요 기록물들을 소개한다.

◇ 진상규명·명예회복에 결정적 역할 한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1999년 9월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4·3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추미애 의원은 4·3 당시 체포돼 군법회의에 회부된 이들의 명단이 수록된 수형인 명부를 공개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있던 이 명부에는 1948년부터 1949년 사이 불법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 또는 사형 선고를 받은 민간인 2천530명의 명단과 인적 사항 등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으며, 대부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재소자 학살 등으로 인해 행방불명됐다.
당시 재판이 판결문과 재판 조서, 변호인 등 기본적 요건조차 갖추지 않은 불법적인 재판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2007년 정부 4·3위원회는 수형자를 희생자에 포함하는 결정을 했다.

이 명부는 훗날 재심을 통한 수형인 명예회복에 중요한 자료가 됐다.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4·3도민연대)는 수형인 명부에 기록된 2천350명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서 생존 수형인들을 찾아 나섰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들은 뒤늦게나마 전과자 낙인을 벗고 싶어 했다. 그렇게 생존 수형인 18명이 2017년 4월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기에 이르렀고, 2018년 9월 재심 결정이 내려졌으며, 2019년 1월 17일 무죄를 의미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행방불명된 수형인 유족들의 재심 청구가 이어졌으며, 법무부는 광주고검 산하에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을 설치해 4·3 수형인에 대한 직권 재심 청구에 나서고 법원도 제주지법에 4·3 전담 재판부를 설치해 뒤늦게나마 명예 회복이 이뤄지고 있다.

◇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기록 '형무소에서 온 엽서'
"'사랑하는 딸아, 기다리고 있으면 곧 가겠다'고 엽서를 써 보냈던 아버지가 끝내 딸을 안아보지 못하고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을 맞을 때, 얼마나 비통하고 무서웠을까…."
지난 2023년 2월 20일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소개된 유족 문혜형씨의 사연은 참석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그의 아버지인 고 문순현씨는 4·3 당시 불법적으로 진행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됐다. 문씨는 살아생전 형무소에서 어머니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가족 안부를 묻는 엽서 석 장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가 남긴 엽서에는 '집안 모두가 모두 평안하였는가. 나도 전과 같이 건강하고 (형무소 내) 공장에서 종사하고 있으니 안심하게나', '늙은 어머님 생각과 어린애 생각이 가슴에 가득하고 있다', '나는 네 생각만 나고 있다' 등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겼다.
문씨는 "듣기만 해도 무서운 대구형무소에서 보내온 세 장의 엽서를 어머니는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셨다"며 "젊은 아버지의 찢어지는 절규를 후세들이 기억한다면 끔찍한 4·3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은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희생자가 형무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유품이 된 엽서들도 4·3기록물로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 4·3 피해신고서와 진아영 할머니 생전 영상…'아픔의 기록'
국가 권력은 수십년간 제주도민에게 4·3에 대한 침묵을 강요했고, 진실을 왜곡·은폐했다.
4·3 진상규명은 반세기가 흐른 1990년대 들어서야 시작됐는데, 피해 실태조차 파악돼있지 않았던 터라 제주도의회가 1993년 4·3특위를 구성해 본격적인 실태 조사에 나섰다.
1994년 2월에는 도의회 4·3 피해신고실이 문을 열어 4·3 관련 피해 실태와 증언, 건의 등을 접수했다.
이곳을 찾은 유족들은 피해자와 신고자의 기본적 인적사항부터 육하원칙에 따른 피해 상황을 적는 칸을 하나씩 채워가며 4·3 피해신고서를 작성했다.
많은 도민의 참여로 피해신고실 운영 1년여 만에 1만여건의 신고가 접수됐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5월 4·3특위 보고서도 발간됐다.
4·3기록물 목록에서 문서로 분류된 1만3천976건 중 대부분이 4·3 피해신고서라고 4·3평화재단은 설명했다.
영상 기록 중에는 '무명천 할머니' 고 진아영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이 포함됐다.
진아영 할머니는 35세였던 1949년 1월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턱을 잃은 탓에 제대로 말하지도, 먹지도 못하게 됐다. 물에 만 밥이나 죽 등으로 연명해야 했으며, 턱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흰 무명천을 동여매고 살아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진 할머니는 그렇게 50년 넘게 후유장애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진 할머니는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명예공동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모두가 희생자이기에"…화해와 상생 정신 담긴 영모원 비문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영모원에 있는 4·3희생자 위령비에 적힌 이 비문도 의미있는 4·3기록물이다.
영모원은 지난 2003년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4·3 희생자를 비롯해 군·경 희생자, 항일운동가 신위를 함께 안치해 화해와 상생의 상징적 장소가 된 곳이다. 과거사 해결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여기 와 고개 숙이라'라는 제목의 비문에는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오래고 아픈 생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며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그 자리에서 피가 멎고 딱지가 앉아 뽀얀 새 살마저 살아날 날을 기다리려 한다'는 내용이 새겨졌다.
이어 '지난 50여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라며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라고 적혔다.
영모원은 4·3추념식 추념사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2018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다'며 영모원을 언급했다.
올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도 "영모원 위령비에 화해와 포용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다시 일어선 4·3의 숨결로 대한민국을 하나로 모으고 미래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기도 했다.
atoz@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