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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샷!] "보호구 착용 않거나 안전 절차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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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땅꺼짐 사고와 대형 산불로 우리 사회 안전불감증에 경고등이 켜진 가운데 위험한 물질을 다루는 대학 연구실험실마저 안전 사각지대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8일 밤 서울 성동구 한양대 신소재공학관에서 학생들이 황산액을 폐기하던 중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50여분 만에 불은 진압됐지만 학생 1명이 얼굴에 화상을 입어 크게 다치고 학생 3명은 경상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황산은 강한 부식성을 띠고 물과 반응하면 격렬하게 발열하는 고위험 화학물질이다.
이 사고를 접한 대학 연구자들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안전불감증, 안전 책임자 인력 부족, 안전 교육의 실효성, 실험 업무 과중, 안전 예산 부족 등으로 대학 연구실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신소재공학 석사과정 박모(25) 씨는 16일 "검증된 공정과 매뉴얼을 갖춘 회사에 비해 대학 연구실에서는 새로운 장비와 물질을 이용하다 보니 위험 인자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고 토로했다.
생명공학 박사과정 이모(29) 씨는 "연구실 안전 교육을 정석으로 이수하려면 반나절이 필요한데 실험할 시간을 빼서 안전 교육을 듣겠다고 지도교수에게 보고하기가 눈치 보인다"고 밝혔다.

대학 연구실의 사고 발생률은 타 기관에 비해 높은 편이다.
국가연구안전정보시스템에 공개된 '2024년 연구실 안전관리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실 사고 발생률은 '대학'이 24.8%로 가장 높았고, '연구기관'(17.3%), '기업부설연구소'(1.2%) 순으로 조사됐다.
작년 12월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초과학연구원(IBS)의 한 실험실 초음파 세척기에서 불이나 2명이 연기를 흡입했고, 같은 해 5월에는 KAIST 산업디자인학과 실험실에서 불이나 1시간 만에 진화됐다.
2023년 10월에는 세종시 한 대학교 실험실에서 화학약품 실험 중 폭발이 일어나 학생 1명이 1도 화상을 입었고, 같은 해 6월에는 강원대 연구실에서 알코올램프에 알코올을 보충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연구원 1명이 2도 화상을 입었다.
대학 연구실의 사고 발생 건수도 2021년 이래로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2020년 137건, 2021년 174건, 2022년 196건, 2023년 226건 연구실 사고가 발생해 사고 발생 연구실당 평균 2건 이상 사고가 되풀이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소재 대학에서 화학공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모(27) 씨는 "황산 등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연구자가 모를 리 없고 순간의 부주의나 실수가 사고를 만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호구 착용을 안 하거나 안전 절차를 생략하는 등 점점 경각심이 없어지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에서 실시하는 안전 점검도 유명무실하다고 꼬집었다.
김씨는 "안전 점검을 할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사전에 예고하고 방문을 한다"면서 "매일 안전 점검표를 작성하고 매달 4일 안전 점검의 날에 체크리스트를 제출해야 하지만, 방문 날짜에 맞춰서 몰아 작성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연구실 안전점검 및 정밀안전진단 지침'에 따르면 각 연구실에서는 매일 안전 점검표를 작성하게 돼 있다. 일반안전·기계기구·전기안전·화공안전·소방안전·가스안전·생물안전 항목으로 나뉘어 총 28개 항목을 점검하는 식이다.
화학물질을 성질별로 분류했는지 여부, 유해화학물질을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는지 여부, 폐기액 관리 상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검이 형식적으로 이뤄진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의무로 이수해야 하는 연구실 안전 교육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소재공학 석사과정 박씨는 "대학원 입학 후 신규로 4시간 수업을 듣고 학기마다 6시간씩 교육을 받게 돼 있는데, 온라인 기본 안전 교육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아 집중도가 떨어지기 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학의 안전 책임자가 대면으로 연구실별 맞춤형 교육을 하지 않는 이상 교육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짚었다.
생명공학 박사과정 이씨는 온라인 교육 동영상을 '10배속' 할 수 있는 꼼수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검색창에 연구실 안전 교육만 쳐도 '스킵(Skip·건너뛰기)하는 법', '배속', '2025년 정답지' 등이 연관검색어로 떴다. 구글 크롬 브라우저를 이용해 웹 페이지 코드를 조작하면 손쉽게 영상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이씨는 "고위험 생물실험실로 분류되는 곳에서 일하고 있어서 6년째 실험실 안전 교육 6시간과 유전자변형생물체(LMO) 안전교육 2시간씩 매 학기 듣고는 있지만, 부끄럽게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교육 내용은 법령·화학·전기·생물·사고사례 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두 과목을 선택해 시간만 채우면 이수가 되기 때문에 다른 사고 상황에 대처하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단순히 학생과 연구자들이 부주의하다고 탓할 수는 없다"면서 "바쁜 연구실 생활 속에서 뒷순위로 밀리는 안전 업무를 하거나 교육을 듣느라 실험을 못 했다고 지도교수에게 말하는 건 꿈도 못 꾼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안전사고에 노출된 약자들을 보호하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학 전 서울대 환경안전원장은 "안전사고나 산업재해는 학생·연구원·작업자처럼 사회 약자에 편중되어 발생한다"면서 "사고에 덜 노출된 교수들은 안전 정책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어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발 방지를 위해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지 않으면서 실무자들이 사고 안 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연구재단에서 교수에게 연구비를 지원할 때 대면 안전 교육 이수증을 필수로 제출하게 하거나 해외 대학처럼 지도 교수가 안전 교육을 제대로 안 받았으면 자기 실험실도 못 들어가게 하는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강지영 대한연구환경안전협회 회장은 "연구 과제별로 사용하는 물질, 규칙, 실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형식적인 사전 위해심사가 아니라 섬세한 맞춤형 안전 관리를 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전문적으로 안전 관리를 수행할 인력과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현재 연구실안전법은 연구기관이 연구자 1천명당 1명 이상의 연구실안전환경관리자를 두도록 정하고 있다.
강 회장은 유럽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를 예시로 들면서 선제적인 예방 조치도 주문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는 위험도가 큰 실험의 경우 자격증 제도를 도입해 실험 전 실험자의 능력을 먼저 평가하고 유럽이나 미국은 위험한 화학물질의 보관, 관리, 폐기 시 전담 관리자를 두어 이들이 없는 야간이나 주말에는 실험을 금지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kuun@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