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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60년 부산과 일본] 질곡의 역사 간직한 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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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부산포 개방 이어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개항
격변의 역사 거쳐 이제는 동북아의 허브항으로

[※ 편집자 주 = 올해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았습니다. 부산은 한일 관계의 굴곡진 역사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온 도시입니다. 부산항 개항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산업화를 거치며 쌓아온 교류의 흔적이 지역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부산에 남겨진 흔적을 따라가며 한일 관계의 과거를 되짚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는 기획 기사를 10회에 걸쳐 매주 한 차례 송고합니다.]

(부산=연합뉴스) 박성제 기자 =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가수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재일 교포 모국 방문단이 부산항에 입항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애절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부산항. 이곳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펼쳐졌던 무대이기도 하다.
지난 150년가량 동안 부산항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역사의 시작은 현재 부산항 공식 개항일인 1876년 2월 27일이다.
물론 일각에선 왜구 어선을 통제하기 위해 부산포 등을 스스로 개방했다는 기록에 따라 1407년 7월 27일을 개항 날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항이 외세에 개방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적 격동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
1876년 개항 이후의 변화는 문헌에 기록된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한국기록관리학회지에 게재된 '개항장으로서의 부산항과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은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벨기에 등 여러 국가와 통상 조약을 맺은 '국제도시'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99년 부산에서 발생한 '경판정 사건'이다.
부산 일본 거류지 내 있는 서양 요리점 경판정에서 술을 마시던 러시아 해군 사관이 일본 기생의 뺨을 때리고 말리던 종업원에게 상처를 입혔다.
당시 이 사건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 간의 외교적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애당초 부산항은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일찌감치 일본의 개발 대상에 올랐던 곳이다.
3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영도와 오륙도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지리적 여건을 갖춘 탓이다.
일본은 이에 개항 이후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고 부산항은 초기 매립공사와 1906년 부두 축조 공사가 이뤄지면서 근대 항만으로서 기본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선박 입출항과 함께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활 공간과 산업 시설이 마련되는 동시에 정박과 물자를 수송하는 주요 요충지로 사용됐다.
제1부두와 제2부두에는 대형 선박을 정박할 수 있을 정도의 국제적 규모의 부두 시설을 만들었다.
특히 1930년대 전후는 일본이 전쟁을 확장하던 시기로, 대륙 침략을 위한 수송항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하기도 했는데, 부산항이 대부분 강제 동원 출발지였다.
강제노역 노동자들은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으로 강제 이송됐고 일부는 다시 대만과 남양 등지로 끌려갔다.

해방을 맞이한 뒤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항이 주요 전진기지로 활용됐다.
당시 부산항 제1부두는 피란민 수송은 물론 국제 원조물자 하역, 군수물자 및 유엔군 수송 등 사람과 물자가 연이어 들어왔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는 부산이 경부성장축의 핵심 도시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현재 부산은 현재 동북아의 허브항으로 거듭나기 위해 신항만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항만 시설을 정비하고 있다.
북항을 시민들의 친수공간으로 되돌려주기 위한 공사 역시 박차를 가하고 있다.
psj19@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