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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억울했다…눈먼 삶도, 짊어진 책임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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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낸 시각장애인 작가 조승리
"시력 대신할 감각은 얼마든지 있죠"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조승리는 열다섯살부터 시력을 잃어갔다. 이제는 "낮과 밤만 겨우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전맹 시각장애인이 됐다. 그러나 시력을 잃었다고 모든 감각을 잃은 건 아니다. 안마사인 그는 상대의 피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력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촉각을 지니고 있다. 아주 낮은 데시벨 속에서도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섬세한 청각 능력도 있다. 무엇보다 내 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란 에세이로 주목받은 그가 두 번째 수필집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세미콜론)을 들고 돌아왔다.

책은 여행을 다녀온 기록을 담았다. 보통 경관을 관람하기 위해 여행을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그의 여정은 좀 특별하다. 일본 도쿄를 여행할 때는 일본저시력협회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의 여행길에는 협회 회원, 가이드, 친구 등 여러 사람이 함께한다.
사실 여행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홀로 다니기 불편할뿐더러 생활도 팍팍했기 때문이다. 그가 여행을 시작하게 된 건 신산한 삶에서 조금은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말레이시아, 베트남, 일본, 중국, 필리핀, 태국 등으로 떠나는 여정은 친구의 애정 어린 조언에서 시작됐다. 친구는 그의 삶이 '점점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해간다'며 여행을 권했다. 저자는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에겐 대학에 가야 할 남동생도, 매달 부어야 하는 적금도 있었다. 가족에게 돈을 보내려면 하루도 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친구는 이렇게 조언했다.
"너 엄청 불행해 보여. 난 네가 자신을 제일 사랑하면 좋겠어."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불행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모든 게 억울했다. 눈먼 삶도, 짊어진 책임감도, 나 자신을 버렸던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조 작가는 친구에게 전화해 도와달라고 애원했고, 친구는 말레이시아로 여행 갈 것을 권했다. 그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물론, 여행이 마냥 행복한 순간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유쾌함과 불쾌함이 함께 했다. 물건 구매를 압박하는 패키지여행 가이드, 현지 가이드에게 무례한 여행객, 기대 이상의 친절을 베푼 현지 운전기사 등 다양한 삶과의 부대낌이 책에 담겼다. 나아가 보는 것을 넘어서는 감각과 삶에 대한 저자 나름의 깨달음도 책에 수록됐다.
"천지 앞에서의 냄새, 웅성이던 사람들의 소리, 피부에 닿았던 공기의 질감, 낯선 감각은 새로운 자극이 되어 넓은 사고와 깊은 사유로 저를 이끕니다. 시력을 대신할 감각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에 저는 감사합니다."
288쪽.

buff27@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