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텍사스 화재 참사 20주기…여전히 그늘진 성매매 여성들의 애환
재개발 철거로 하나씩 지워져…여성단체 "수십년 인권유린 외면 말아야"
(서울=연합뉴스) 이율립 기자 = "화재 참사 20년이 흐른 지금, 성북구는 뒤늦게 자활지원조례를 제정하고 미아리 폐쇄를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고 싶습니다. 그 안에 '여성들'이 있습니까?" (최민혜 대구여성인권센터 대표)
지난 22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여성단체들의 기자회견에서는 서울 성북구의 성매매 집결지, 이른바 '미아리 텍사스'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지원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와 함께 20년 전 화재 참사가 거론됐다.
성매매 여성이 도구처럼 쓰인 뒤 버려지는 구조는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올해 20주기를 맞이한 화재 참사는 2005년 3월 27일 '화초정'이라는 업소에서 벌어졌다.
불법 개조된 1∼2평 남짓한 방, 합판으로 막힌 창문, 쇠창살이 달린 미닫이문은 여성들의 탈출을 가로막았다. 사실상 감금이나 다름없는 구조였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성매매 여성 5명이 목숨을 잃었고, 송모(당시 29세)씨가 중상을 입었다.
절박한 구조 신호가 외면당한 정황도 드러났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송씨는 정신지체 3급 장애인으로, 참사 전날 밤 "성매매를 하고 있다. 도와달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송씨는 경찰서에 찾아갔지만, 당시 경찰은 장애인인 그를 가족이나 보호시설에 보내기는커녕 업소로 되돌려보냈고, 그는 참사를 겪어야 했다.
화초정 업주는 송씨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일 남성 5∼6명을 상대로 성매매를 강요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성매매 여성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현실은 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
참사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이날 회견에는 불과 4년 전 미아리 텍사스에서 일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가 공유됐다.
그는 하루에 6∼7번에서 많게는 15번의 성매매를 해야 했는데 한 번에 겨우 3만원을 벌었다고 했다. 단 하루를 쉬더라도 200만원에 가까운 '결근비'를 내야 했다.
이 여성은 "선불금 빚은 죽어야 해결되겠다 싶었다"고 털어놨다.
상담소의 도움으로 이제는 미아리를 떠나 낮에 자활센터, 밤에는 자격증 학원에 다닌다는 이 여성은 미아리 폐쇄 소식에도 빚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여성들을 걱정했다.
"저처럼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이거나, 더 안 좋은 성매매 가게로 가게 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9월에는 유치원생 딸을 홀로 키우던 미아리 텍사스의 성매매 여성이 사채를 빌린 뒤 빚 독촉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등졌다.
23일 자치구와 여성단체 등에 따르면 미아리 텍사스를 포함한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 일대는 철거가 완료되면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변모한다.
이주에 합의한 성매매 업소들은 신월곡 1구역 조합으로부터 동산 이전비를 받고, 긴 시간 불법수익을 쌓아온 건물주나 땅 주인은 재개발 수익까지 올리게 된다.
성매매 여성들과 여성단체들은 짧게는 수년, 길게는 20∼30년 동안 이곳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착취당한 여성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촉구하고 있다.
불법으로 이득을 취해온 건물주와 여성들을 착취해 부를 쌓은 업주들이 이익을 챙길 때 여성들은 마땅한 생계 대책이나 지원도 못 받고 쫓겨나 더 취약한 곳으로 내몰린다는 것이다.
노랑조이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는 이들에 대해 "직장이자 주거지이자 생활 생태계에서 뽑혀 나가게 된 상황"이라며 "현실적인 지원 없이 낡은 건물처럼 쓸어버리려는 비인간적 행태는 민주 시민에 대한 기만이고 모욕"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여성단체 대표들은 여성가족부, 성북구 측과 면담했다.
여가부는 향후 관련 단체와 만나 지원 방안을 모색하고 서울시와 성북구청과도 협의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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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