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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웃] 흔들리는 달러 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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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1911∼1993)은 1960년 출간한 저서 <금과 달러 위기>에서 기축통화인 달러가 지닌 구조적 모순,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 이론을 제시했다. 달러는 수요가 커 가치가 상승하는데, 미국 입장에선 달러 가치가 오르면 수출 경쟁력이 약화돼 무역수지가 악화하고 국가부채나 재정적자가 쌓인다. 반대로 달러 공급이 줄면 세계 경제가 유동성 부족에 시달린다. 이는 달러 패권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안 요소다.

기축통화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축으로 기능해왔다. 과거에는 금화·은화가 그 역할을 맡았고,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영국의 파운드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통화였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해 미국 달러가 금에 연동된 세계의 중심 통화로 자리매김했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정해놓고, 세계 각국의 통화를 그 달러에 맞춰 연결하는 새로운 국제 통화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 태환을 중단하면서 금본위제는 막을 내리고 세계는 변동환율 체제로 접어들었다.

달러의 지배력에도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70%에 달하던 세계 외환보유액 내 달러 비중이 현재 58%로 감소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의 달러 기반 금융제재가 '달러의 무기화'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이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 등은 자국 통화 결제를 확대하고, 브릭스(BRICS) 국가들은 탈(脫)달러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암호화폐의 등장도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 달러 중심의 통화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고 당장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등장할 가능성은 낮다. 유로화는 유럽연합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재정 격차 문제를 안고 있으며, 위안화는 환율 통제와 자본시장 개방 부족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기축통화는 단지 경제 규모나 교역량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법치주의, 군사력, 금융 인프라에 대한 국제적 신뢰 등 다층적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선택받는 통화는 달러라는 사실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 질서의 변화는 달러 패권을 흔드는 외부 충격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미·중 간 '관세 전쟁'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는 촉매제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하고 달러를 경제제재의 도구로 활용한다면, 많은 국가들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브릭스의 공동 통화 논의나 중동 국가들의 위안화 결제 확대는 그 신호탄일 수 있다.
jongwoo@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