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하다면 100번이고, 200번이고 문을 두드릴 거예요. 이번 판결이 그 기록이자 증거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길갑순 할머니의 아들 김영만(69) 씨는 27일 연합뉴스에 최근 국내 법원이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과 관련한 심경을 이같이 밝혔다.
김씨는 "일본 교과서에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이 왜곡된 채 실리는 것만 봐도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며 "이번 소송은 단지 배상받기 위한 것이 아닌 피해자의 목소리를 역사에 기록하고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끌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결국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25일 청주지법 민사 7단독 이효두 판사는 김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2억원을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정확한 판결 취지와 배상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4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난 길 할머니는 1941년 17세의 나이에 일본 나가사키 섬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마을마다 처녀 1명을 강제로 징발한 이른바 '처녀공출'을 피하기 위해 호적상 부부로 위장했지만, 결국 발각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4년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길 할머니는 "일본군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다 뜨겁게 달궈진 인두로 등을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피해 사실은 오랜 시간 가족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위안부 이야기 등을 다룬 1991년 방영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본 길 할머니가 충격을 받고 며칠간 식사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은 비로소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길 할머니와 아들 김씨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 전신) 활동에 참여해 위안부 피해자를 발굴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1993년에는 피해자와 그 가족으로 구성된 일본군대 강제위안부 피해대책협의회(현 일본군대위안부희생자유족회)를 창립해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활동을 이어갔다.
김씨는 "1994년 피해자와 가족 23명이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입국해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며 "또 일본 전역을 다니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렸는데 우리의 목소리가 국내외 16개국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주목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당시 어머니가 일본 총리부 경비에게 맞아 뇌진탕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데 후유증 때문인지 어머니는 1998년 급성 폐암으로 74세의 나이로 작고하셨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국내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위한 서명운동, 학술대회 등을 이어갔고 지난해 1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 판결에 대해 담화를 열고 "국제법과 한일 양국 간 합의에 명백히 반하는 것으로 매우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이번 판결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징용을 포함한 일련의 역사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외교장관 간 '위안부 합의' 등으로 해결됐으며, 이에 배치되는 한국 사법부 판단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김씨는 "피해자 없이 진행된 합의는 의미가 없다"며 "일본 교과서에서 위안부 내용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이번 소송은 국가 간 진정한 화합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했다.
이어 "당연히 승소할 거라 믿었지만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이 울고 기다리는 시간도 참 힘들었다"며 "일본 정부가 가슴을 활짝 열고 피해자들과 대화를 시작해 하나하나 풀어나가길 기대한다"고 부연했다.
국내 법원이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일본 정부는 주권 국가가 다른 나라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국제관습법상의 '국가면제'(주권면제) 원칙에 따라 그간 국내에서 진행된 위안부 관련 소송에 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판결이 확정됐으나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피해자 측이 압류할 수 있는 일본 정부의 재산을 찾아내 법원에 강제 처분을 신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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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