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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잠실구장에 도착한 KIA 타이거즈 선수단이 팬들의 사인 요청을 뒤로 하고 경기장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영상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파장은 컸다. 팬들은 공분했다. 도대체 어린이 팬들까지 외면하는 몰인정에 화가 단단히 났다.
팬들은 선수들의 분수 모르는 특권의식을 꼬집는다. 십여년 전만 해도 프로야구는 암흑기였다. 수천명도 안되는 입장관중, 신용카드 할인을 받으면 천원짜리 몇 장으로도 언제든지 야구를 볼 수 있었다. 프로야구 인기가 높아지며 FA대박, 연봉급상승으로 선수들은 프로야구의 성장 열매를 독식했다. '이제 배부르니 팬들은 안중에도 없다'고 질타한다. 한마디로 누구 때문에 존재하는 지를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팬들의 외침은 흔들림 없는 절대 명제다. 야구를 프로스포츠로 만들고, 문화, 나아가 산업화로 이끄는 원동력은 팬들의 존재다. 팬들과의 만남, 서비스를 귀찮아하고 피하는 것은 프로야구 선수라는 직업 자체를 부정하는 것ㅇ 맞다.
SNS의 발달은 선수와 팬 사이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많은 선수들은 보는 눈이 사방에 있고, 온라인상에서 나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일이 커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선수와 팬, 누가 '갑'이냐 '을'이냐에 대해선 보는 시각에 따라 주장이 판이하다.
한 구단 프런트는 지난주 수십명에 둘러싸여 사인을 하고 있는 선수에게 훈련시간이 촉박함을 전달하다 팬들로부터 거친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수십명에게 사인을 해주고 돌아서는 해당 선수에게도 날선 단어가 등에 꽂혔다. 20명에게 사인을 해줘도 사인을 받지 못한 21번째 팬은 속상할 수 밖에 없다. 프로선수에 대한 칭찬과 비판은 팬들의 고유 권리이지만 때로는 선수들도 할말큼 했는데 야단맞으면 섭섭할 수 있다.
지하주차장에서 사인을 받기위해 차량 뒤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팬에 소스라치게 놀란 선수도 있었다. 최근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외국인 선수 한명은 쉬는 날 어린 자녀를 안고 집앞을 산책하다 팬들의 사인요청 쇄도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야구장에서의 팬서비스와 사생활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잠실구장 사인거부 영상에 등장하는 KIA 선수들 중 광주 홈구장에서 성심껏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던 선수들도 분명 있었다. 원정경기의 경우 훈련시간이 빠듯하다. 특히 국내 현실에서는 후배 선수들은 자신의 훈련 외에 팀 훈련보조(장비챙기기, 훈련마무리)를 해야만 한다. 시간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잠실구장은 원정팀에 대한 시설이 최악 수준이다. 일부 어린선수들은 구단버스에서 옷도 갈아입고 휴식도 취하지만 오가다 팬들에게 집중 사인요청을 받으면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한명을 해주면 금방 10명, 20명으로 불어난다. 사인 한장도 수십차례면 꽤 시간이 걸린다. 선수가 예의를 지킨다고 해도 양해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부 팬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주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 같은 반목이 반복되고있다. 10개 구단과 KBO가 문제를 풀어야한다. 각 구단마다 연간 7~10차례 팬사인회를 열고 있다. 사인회 참가 선수 인원을 다소 줄이더라도 대신 횟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 매일 경기장에 오는 팬들도 있고, 간혹 오는 팬들도 많다. 선수들에게도 시간 부담이 덜하다. 원정 때도 소박하게 사인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구단간 합의만 되면 문제될 것이 없다.
출근 시간에 한해 보안요원의 입회 하에 인원통제를 통해 사진촬영과 사인요청을 응하는 유연함도 필요하다. 대신 퇴근 시간과 원정 숙소 등에서는 선수들이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
팬서비스를 구단 내규로 명확하게 정립해둔 팀은 없다. 이를 두고 오해 소지가 커진다면 가이드 라인을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존중을 담아 자발적으로 행해야하는 팬서비스를 의무화 하면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를 정례화 한다고 해서 팬과 선수들이 공유하는 사랑과 존중, 배려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입장이 다를 때는 규칙이 필요하다. 더 많은 이들이 웃을 수 있다. 박재호 기자 jh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