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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이원만 기자] 드디어 '인내심의 미덕'을 깨달은 것일까.
원래 배지환은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뒤 계속 1번타자로만 선발 출전해왔다. 수비 포지션은 중견수와 좌익수를 오갔지만, 타순은 늘 1번이었다.
하지만 배지환은 리드오프 타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지난 9일 루이빌 배츠(신시내티 레즈 산하 트리플A팀)와의 원정경기부터 6경기 연속 팀의 리드오프로 나왔지만, 타율이 불과 0.160(25타수 4안타)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배지환은 17일 톨레도전 때는 아예 선발명단에서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2회초 대수비로 출전해 8번 타순에 배치돼 5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앞선 세 타석 모두 범타로 물러나다 9회말 첫 안타를 쳤다. 그러나 연장 12회 말 무사 2루 끝내기 기회에 1루 땅볼에 그쳤다.
그나마 안타를 1개 친 덕분인지, 인디애나폴리스 코칭스태프는 배지환을 다시 리드오프로 불러 올렸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트리플A 잔류마저도 위협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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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환은 이 기회는 잘 살렸다. 위기의식을 느낀 것인지 그간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성급한 승부'를 자제하고 타석에서 최대한 신중하게 승부에 임했다. 결과는 4타수 3안타 1볼넷 1도루 4득점. 리드오프의 역할에 100% 충실한 활약을 펼쳤다. 시즌 타율도 0.167에서 2할3푼5리(34타수 8안타)까지 올랐다.
배지환이 모처럼 리드오프 역할을 잘 해준 덕분에 인디애나폴리스도 7대6으로 승리하며 1패 뒤 2연승으로 톨레도 상대 위닝시리즈를 달성했다.
배지환은 1회말 첫 타석부터 상대의 허를 찌르는 영리한 플레이를 했다. 상대 선발은 지난해 KBO리그 LG트윈스에서 선발로 13승(5패)을 거둔 디트릭 엔스였다.
엔스의 초구 포심 패스트볼(90마일)이 가운데 위로 떴다. 실투였다. 배지환은 여기서 자신의 장기를 살렸다. 치는 대신 기습적인 푸시 번트를 대고 1루로 냅다 뛰었다. 3루수 쪽으로 거의 완벽한 번트 타구가 나왔다.
상대 3루수 리 하오유가 서둘러 타구를 잡아 1루로 던졌지만, 악송구가 됐다. 그 사이 배지환은 여유있게 1루를 돌아 2구까지 진루했다. 내야 안타에 이은 송구실책으로 기록됐다. 여유있게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간 배지환은 후속 닉 솔락의 유격수 앞 땅볼 때 3루까지 갔고, 말콤 누네즈의 적시 2루타 때 팀의 첫 득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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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환은 이 타석에서 전과 완전히 달라진 점을 선보였다. 신중하게 타석에서 공을 고르며 불리한 볼카운트를 극복해내는 모습이었다. 초구 스트라이크, 2구 헛스윙으로 볼카운트가 0B2S로 몰렸다. 그러나 배지환은 3구째 포심을 파울로 걷어낸 뒤 침착하게 2개의 볼을 골라냈다. 볼카운트 2B2S가 됐다.
엔스의 6구째 커터(84.9마일)가 낮게 들어왔다. 배지환은 이걸 퍼올려 우익수 쪽 2루타를 날렸다. 타구 속도가 106마일에 이를 정도로 하드히트(정타)였다. 2루에 나간 배지환은 솔락의 좌전 2루타 때 다시 홈으로 들어와 역전 득점을 달성했다.
배지환은 5회말 세 번째 타석에서도 엔스를 상대해 무려 9구까지 가는 긴 승부를 펼쳤다. 올해 배지환의 가장 긴 승부였다. 드디어 '참을성의 미덕'을 깨달은 듯 했다. 이번에도 초반 승부가 불리하게 돌아갔다. 스트라이크-볼-스트라이크-파울로 순식간에 볼카운트 1B2S로 몰렸다.
엔스는 5구째 몸쪽으로 꽉 차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제구가 잘 된 헛스윙 유도용 승부구였다. 전날까지의 배지환이었다면 여지없이 헛스윙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날의 배지환은 '참을성'을 아는 타자였다. 볼을 지켜봤다. 볼카운트 2B2S. 6구째 높은 포심은 파울. 7구째 바깥쪽 존을 살짝 벗어나는 커터도 참아냈다. 풀카운트가 됐다. 8구째 92.4마일 포심은 파울.
드디어 9구까지 왔다. 엔스는 포심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너무 낮았다. 배지환은 끝내 승리했다. 볼넷으로 1루를 밟아 이날 세 번째 출루에 성공했다.
무려 9구 승부끝에 배지환에게 패한 엔스는 흔들렸다. 솔락의 투수 앞 땅볼 때 송구 실책을 저질렀다. 모든 주자가 살았다. 배지환은 빠른 발로 3루까지 나갔고, 이후 누네즈의 우익수 희생플라이 때 손쉽게 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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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오프로서 100점 활약을 펼친 배지환은 8회말에는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이미 자기 몫은 다한 상태였다. 타격, 선구안, 주루플레이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었다. 이날같은 플레이가 바로 메이저리그 콜업을 가능케 하는 모습이다. 배지환이 이 경기를 변화의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