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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아닌 다수 국민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정치 절실"
한국은 '빨리빨리'를 목표로 압축 성장한 국가다. 군사정부가 들어선 1960년대 이후,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발전했다. 1965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8달러로 세계 121위에 불과했으나 2017년 한국의 실질 구매력은 1인당 GDP 4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한때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을 제쳤다.
베이비부머부터 X세대까지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할 대상이었으나 Z세대에게 일본은 이제 '물가 싸고 여행하기 좋은 나라'나 '과거사 문제를 사과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젊은 층에 일본은 경쟁심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 그런 나라가 된 것이다.
경제뿐 아니다. 드라마, 영화, K팝 등 이른바 K문화가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미국의 팝 문화와 할리우드를 제외하고 단일국가의 문화가 이처럼 팬덤을 일으키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하지만 이처럼 영광의 순간에 "한국은 자살을 결심했다"고 이관후 국회 입법조사처 처장은 말한다. 신간 '압축 소멸 사회'(한겨레출판)를 통해서다.
◇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다
'대한민국의 자살' 징후는 낮은 출생률에서 확인된다.
2012년 1.3 수준이던 합계출산율은 10년 만인 2022년 0.78로 떨어졌다. 심지어 수도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59로 전국 최저였다. 2023년 2분기 기준으로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53으로 더 낮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출산율 1.0이 안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0.5면 회복 탄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수준이다. 다시 출생률을 회복할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출생률을 회복할 수 없는 대한민국은 조용히 그대로 소멸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반도를 노리는 외세가 있다면 그들은 '기다림'이라는 확실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한두 세대 안에 이 나라는 분명히 소멸로 들어서게 되어 있으니까."
◇ 정부 15년간 저출생 대책에 280조원 썼지만…
정부도 저출생의 심각함을 인지했다. 정부가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저출생 대책에 투입한 예산만 280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같은 기간 합계 출산율은 1.13에서 0.81로 하락했다. 헛돈을 쓴 것이다. 저자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정부가 해 온 일은, 이를테면 화장실 갈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화장실로 가는 길을 만들고, 표지판을 만들고, 휴게소를 만들고 화장실을 대리석과 보석으로 꾸미고, 그 앞에서 일 보고 나온 사람들을 위해 박수 부대를 준비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출생률이 이처럼 떨어지는 건 젊은 층이 아이 낳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2023년 8월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청년(19~34세)은 36.4%에 불과했다. 2012년 동일한 조사 때 결혼을 긍정한 청년 비율(56.5%)에 견줘 20.1%포인트나 하락했다. 정부 지원책이 양산된 시기임을 생각하면 이는 심각한 결과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처럼 출생률이 떨어지는 건 애를 낳아 기를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황세원 일인연구소 대표에 따르면 청년 중에서 대기업 이상의 정규직이나 전문직에 취업할 확률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문제는 10%의 정규직과 90%의 그 밖의 일자리 사이에 너무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0% 안에 들기 위한 경쟁은 어린 시절부터 치열하게 전개된다.
입시의 중심에 있는 고등학교가 특히 그렇다. 책에 인용된 입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고교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교는 상위 10%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90%의 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공공 교육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연세대 최상수 사회학과 교수는 좋은 대학에 못 가면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건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내러티브가 있다며 이는 "저출생 현상을 고도로 밀어붙이는 압력을 제공하는 문화적 저변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치열한 경쟁은 학벌 취득에서 끝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부동산 구매를 놓고 또 한차례 경쟁한다. 어렸을 때는 사교육을 통해 경쟁하고, 커서는 "부동산을 쟁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하지만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대부분의 청년에게 서울 아파트는 '그림의 떡'이 된 지 오래다.
사회와 경제가 발전했지만, 자살률이 압도적인 세계 1위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국은 지난 2003년 OECD 자살률 1위에 오른 후 20년 넘게 그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OECD 국가들의 자살률이 이 기간 감소했다는 사실과 비교된다.
저자는 "산업화와 민주화는 대한민국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국민에게 불안을 안겨줬다"면서 "이것이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말한 것의 실체"라고 분석한다.
◇ "압축 소멸 막으려면 정치 복원해야"
저자는 성공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발전주의, 성장 이데올로기, 능력주의, 개인주의, 개발주의가 이제는 거꾸로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급격하게 심화한 양극화가 각자도생의 문화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 세계 최저의 저출생, 세계 최고의 자살률, OECD 최고 수준의 사회적 양극화, 지방 소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고령 사회 진입, 민주주의 질 저하 등이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건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에서 '압축 소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는 "우리 사회를 덮친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당장의 사회적 갈등이나 재난조차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며 미래를 걱정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정치를 왜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언제든지 물을 수 있는 정치,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정치, 소수의 지지자가 아니라 다수 국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정치가 우리에게는 절실합니다."
258쪽.
buff27@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