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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와 정면 승부를 택했다.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가 내달 8일 베일을 벗는다.
'헤다 가블러'는 그 어떤 수식어도 그 이름의 명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간한 희곡이다.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이자 자신의 성인 가블러를 붙인 채 살아가는 여주인공 헤다를 앞세워, 남성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적인 여성의 주체를 과감히 천명하면서 17세기 남성 중심적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욕망의 파열과 실재, 운명의 지배와 근원적 딜레마를 날선 비극 속에 담아내어 연극사적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은 유럽 전역을 넘어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공연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켜 왔다. 국내 프로무대에서는 세계 초연 이후 120년 만에 처음 소개됐는데, 그 작품이 바로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른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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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연출은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도 21세기판 헤다들은 존재한다. 돈, 명예, 권력 등 사회 구조가 수직적으로 제안하는 가치들을 차지하는데 진절머리가 난 이들은 과감히 자기파괴를 행하기도 한다"라며 "가해지는 일체의 사회적 가치를 내면에서부터 해체하여 헤다는 마침내 자신의 육신까지 저버리지만 그녀의 실존은 끝끝내 살아남는다. 작품을 하면서 보편적 가치라는 말로 개인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구조주의의 최면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최면 속에서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매고 있는 오늘날의 헤다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어떤 손을 내밀 수 있는가를 질문해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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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적인 감각으로 배역을 흡수하는 배우 이혜영이 다시 한번 타오르는 불꽃, 헤다로 분한다. 배우의 복잡한 심리 묘사가 관건으로 불리는 작품의 특성상 어떤 배우가 헤다 역을 맡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평가될 정도로 주인공 헤다는 까다롭고 어려운 배역이다. 2012년 초연 당시 박정희 연출은 "헤다를 할 배우는 이혜영 밖에 없다"라는 판단으로 이혜영 배우를 한국의 첫 헤다로 맞이했다. 당시 배우 이혜영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권태와 공허, 정신적 고립감을 감도 높이 연기해 내면서 쏟아지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한국의 첫 번째 헤다"이자, "한국의 독보적인 헤다"로 거듭났다.
무대, 의상, 음악, 영상, 소품 등 무대예술의 미학적 요소들은 초연과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에게 다가선다. 초연에서는 웅장하고 클래식한 고전의 시대적 배경을 구현해 지배자이자 신격화된 헤다의 모습을 부각했다면, 2025년 '헤다 가블러'는 자유와 광란의 시대를 무대로 옮겨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를 위태롭게 걷는 인간 헤다의 눈부신 추락을 비춘다. 세련되고 우아하지만 몽환적이고 섬광적인 요소들로 가득 찬 무대 곳곳은 "그 끝 말이야, 아름답게 만들어 볼 생각 없어?"라고 울리는 극 중 헤다의 대사를 더욱 도취적이고 자극적으로 담아낸다.
고재완 기자 star7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