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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어 감독으로서 너무 행복하다."
23일 밤,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울산 현대-포항 스틸러스의 FA컵 준결승전은 '동해안 더비'의 명성에 걸맞은 명승부였다. 물러설 수 없는 전쟁, 120분간의 연장 혈투(1대1무)로도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8명의 키커가 나선 승부차기끝에 울산이 4대3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오후 7시30분 킥오프한 경기는 오후 10시20분에야 막을 내렸다. 초가을밤, 170분간 모든 것을 쏟아낸 그라운드에서 모두가 하나 돼 이뤄낸 짜릿한 승리에 김도훈 울산 감독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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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현우 VS 강현무의 GK전쟁
운명의 승부차기, '빛현우' 조현우의 시간이었다. 울산, 포항 각 5명의 키커들이 번갈아 슈팅을 날렸지만 3-3,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울산 6번째 키커 정승현의 킥을 포항 수문장 강현무가 보란듯이 막아냈다. 선방 직후 강현무가 골대 앞에 섰다. 포항 6번째 키커는 강현무였다. 성공하면 4대3으로 포항이 결승에 올라가는 상황, '국대 골키퍼' 조현우가 '골키퍼 맞대결'에서 강현무를 막아내며 울산을 구했다. 7번째 울산 이동경, 포항 최영준의 슈팅이 나란히 빗나간 후 울산의 8번째 키커 홍 철이 가볍게 골망을 갈랐다. 포항 8번째 키커 송민규의 슈팅은 조현우의 손끝에 걸렸다. 울산의 4대3 승리, 극적인 결승행이 조현우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조현우는 이날 포항 8개의 슈팅 중 3개를 막아냈다.'그저 빛'이었다. 베테랑 박주호가 "해줄 줄 알았다"며 조현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김도훈 감독 역시 "(조)현우가 너무 잘막아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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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12분에 나온 '울산의 투사' 김태환 자책골은 믿기 힘든, 아찔한 장면이었다. 전반 12분 측면에서 송민규의 강한 압박을 피해 골키퍼 조현우에게 건넨 김태환의 왼발 로빙 백패스가 골대 안으로 빨려들었다. 올시즌 45골 15실점의 최다득점, 최소실점팀 선두 울산은 자책골이 전무했다.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자책골이 이겨야 사는 단판승부, FA컵 준결승에서 나왔다. 징크스의 암운이 드리우는 듯했던 순간 하프타임 라커룸 분위기는 어땠을까. 김 감독은 "선수들끼리 급할 필요없이 우리 경기 한다면 할 수 있다며 서로 믿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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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인성불패'의 과학
김인성이 골을 넣는 경기에서 울산은 지지 않는다. 2017년 김 감독의 부임 이후 줄곧 이어져온 거짓말 같은 기록이다. 후반 8분, 울산의 '천금' 동점골이 김인성의 발끝에서 나왔다. 2015년 인천에서, 2017년 이후 울산에서 FA컵 주요 고비마다 한방을 터뜨려주던 '김도훈의 페르소나'다. 홍 철의 프리킥이 골대를 맞고 나오자 김인성이 지체없이 오른발 발리로 골망을 흔들었다. 올 시즌 포항과의 2경기에서 잇달아 골맛을 본 김인성이 '동해안 더비' 3경기 연속골로 울산을 구했다. 절체절명의 승부차기, 김인성은 두 차례 킥을 연거푸 실축했지만, 울산은 끝내 승리했다. 이쯤 되면 '인성불패'는 과학이다.
④ 골무원 주니오의 실축, 잔디탓?
살 떨리는 승부차기, 팽팽한 3-3 상황에서 울산의 5번째 키커 주니오가 나섰다. 노려찬 슈팅이 공중으로 높이 떴다. '원샷원킬 골무원', 22경기 24골에 빛나는 득점왕 주니오의 실축은 대반전이었다. 이어진 포항 팔로세비치의 슈팅마저 크로스바를 넘겼다. 예기치 못한 에이스들의 '홈런볼'에 현장에선 실소가 터졌다. 울산시설관리공단의 세심한 지원 덕에 리그 최고의 잔디를 자랑하는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이지만 한여름 폭염, 태풍엔 장사 없었다. 심지어 이날 내린 비와 치열한 연장 혈투 탓에 잔디 곳곳이 들렸다. 경기후 '잔디 탓'에 대한 질문에 김 감독과 조현우는 "울산 잔디상태는 최상인데, 오늘은 듬성듬성한 부분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잔디 탓은 하지 않았다. 김도훈 감독은 "결과가 좋다보니 잔디도 우리 편이었던 것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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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당초 선발 왼쪽 풀백은 베테랑 박주호였다. 몸을 풀던 중 가벼운 부상이 생기면서 홍 철이 선발로 들어갔다. 120분간 숨막힐 듯 팽팽했던 승부는 그의 왼발에서 결정났다. 양팀의 실축이 계속되던 승부차기 상황, '울산 8번 키커' 홍 철은 너무도 가볍고 산뜻한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이날 김인성의 동점골 역시 시작점은 홍 철의 날선 프리킥이었다. 여름 이적시장 홍 철을 안데리고 왔다면 어쩔 뻔했나. '꿀영입'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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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결승행은 'K리그 레전드' 김 감독이 사령탑으로서 일군 4번째 FA컵 결승행이다. 김 감독과 FA컵의 인연은 특별하다.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FA컵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축구인이다. 선수시절인 2000년 일본 생활을 마치고 전북으로 복귀한 첫 해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2011년 성남 코치 시절에도 FA컵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감독으로 데뷔한 2015년, 강등권 인천의 창단 첫 FA컵 결승행 기적을 썼다. FC서울과의 결승전에서 1대3으로 석패했지만 '김도훈 리더십'은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17년 울산 부임 첫해, 김 감독은 끝내 FA컵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명가' 울산이 1983년 12월 창단 이후 처음으로 FA컵 정상에 섰다. 김 감독은 2018년에도 결승 진출 역사를 썼지만 대구 돌풍에 가로막혀 2연패를 놓쳤다. 울산에서 4년새 3번째, 감독 통산 4번째 결승행 위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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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6일, 울산은 리그 최종전에서 포항에 1대4로 패하며 다잡은 우승을 놓쳤다. 다득점 1골 차로 전북에게 역전 우승을 내줬다. 2013년 12월 6일 극장골을 허용하며 포항에게 우승을 내준 악몽이 6년만에 그대로 재현됐고, 이후 팬들 사이엔 '울산의 우승은 포항에게 물어보라'는 웃지 못할 우스개까지 돌았다.
올 시즌 단순한 라이벌전 이상의 '축구전쟁'이었던 동해안 더비에서 심기일전, 와신상담한 울산은 압승했다. 6월 6일 원정에서 4대0으로 대승했고, 8월 15일 안방에서 2대0으로 완승했다. 올 시즌 3번째 외나무 혈투, 결국 짜릿한 결승행으로 지긋지긋한 트라우마를 떨쳐냈다.
울산=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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