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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의 티뷰론 골프클럽(파72)에서 막을 내린 LPGA 투어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챔피언십(총상금 250만달러) 마지막 18번 홀.
렉시 톰슨(22)이 중장거리 버디 퍼팅을 홀 왼쪽에 잘 붙여 세웠다. 50cm 남짓한 거리. 2위와 2타 차, 짧은 파 퍼팅을 성공시키면 우승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셋업을 한 톰슨은 긴장한 듯 정상적인 스트로크를 하지 못했다. 퍼터와 접촉했던 공이 갤러리의 탄식과 함께 홀 오른쪽으로 흘러버렸다. 이날 버디만 6개를 기록했던 톰슨의 첫 보기. 뒷조에 있던 아리아 주타누간(22)은 17,18번 홀 중거리 퍼트를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연속 버디로 연장 없이 역전우승을 확정지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톰슨이 만약 마지막 홀 파 퍼팅에 성공했다면? 주타누간은 과연 2홀 연속 롱퍼팅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아무튼 톰슨의 이 퍼팅 실수로 박성현(24)과 유소연(27)도 올해의 선수상을 공동수상 할 수 있었다. 주타누간과 한국 선수들의 행운이 톰슨에게는 큰 불운이었다. 그는 최저타수상과 보너스 100만 달러를 받는 순간에도 활짝 웃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이날 이후다. 자칫 짧은 퍼팅에 대한 공포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앞날이 구만리인 골퍼에게 가혹한 시련일 수 있다.
골퍼들이 흔히 쓰는 입스(yips)란 단어가 있다. 샷이나 퍼팅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불안 증세를 말한다. 정상적인 샷이나 퍼팅을 구사하지 못하게 된다. 골퍼 뿐 아니다. 농구, 야구도 있다. 야구로 치면 투수가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도 일종의 입스다. 피아니스트에게도 있다고 한다.
공통점은 딱 하나, 육체가 아닌 심리에서 기인한 문제라는 점이다.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 몸을 지배하는 것. 불수의근인 심장이 수의근인 팔 등에 신호를 보내 얼어붙게 만든다.
비단 프로 선수만 겪는 건 아니다. 전체 골퍼의 25%는 입스를 경험한다고 하니, 4명 중 1명은 이런 증세를 겪어본 적이 있는 셈이다. 혹시 어느날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오더라도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극복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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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그림자를 떨치는 방법은 딱 하나다. '단절' 뿐이다. 하지만 떨쳐버리기가 영 쉽지 않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늪처럼 더 깊게 빠져든다. 올시즌 LPGA 투어에서 3승을 올린 김인경은 과연 어떻게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짧은 퍼트를 놓쳐 우승을 하지 못했는데 극복하는 데 정말 오랜 과정이 필요했다. 많은 분들이 날 도와줬다. 많은 연습을 했다. 이제는 짧은 퍼트를 놓치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그 덕에 난 다시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당시 일이 내게 준 교훈은 '모든 샷을 할 때 똑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단 거리 퍼팅도 마찬가지다."
기술적 연습 뿐이 아니었다. 멘탈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했다. 사건 이후 그는 방황했다. 골프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사찰을 찾기도 했다. 법륜스님과 함께 수행도 하고, 봉사활동도 했다."남들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스포츠를 계속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 속에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수많은 기술과 멘탈적인 노력 끝에 결국 김인경은 지난해 레인우드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4년 만에 슬럼프를 떨쳐냈다. 올시즌에는 '리코 위민스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5년을 미뤄온 메이저 첫 승을 신고하는 등 시즌 3승을 거두며 슬럼프 완전 졸업을 선언했다.
렉시 톰슨은 박성현과 함께 세계여자골프 10년을 이끌어갈 라이벌이자 동반자다. 강력한 라이벌의 존재는 서로를 발전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톰슨이 이번 실수를 멋지게 딛고 일어서 박성현의 멋진 라이벌로 함께 발전해 가기를 바란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실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진짜 실수다. 진정 멋진 사람은 실수를 안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 더 크게 발전하는 사람이다. 김인경 처럼….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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