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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오는 30일 베트남 전쟁(1955∼1975) 종전·통일 50주년을 맞는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수도인 사이공(현 호찌민)을 장악하고 남베트남 정부의 항복을 받아내 20년간 계속된 전쟁을 끝내고 남북통일을 이뤘다.
베트남 정부는 성대한 국가적 기념행사로 승전과 통일을 자축할 예정이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던 프랑스와 '베트남 국부' 호찌민이 이끈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 간 대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한 뒤 베트남에서 물러났으나, 휴전 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친서방 남베트남으로 분단됐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하는 등 전쟁에 본격 개입했다.
하지만 미군이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내 친북 게릴라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게릴라전에 고전, 인명 피해가 늘어났다.
게다가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무능이 두드러지면서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거세게 번졌다.
결국 미군은 1973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은 2년여 만에 남베트남을 무너뜨리고 전쟁을 끝냈다.
이 전쟁을 통해 북베트남군·베트콩 측은 80만 명 이상, 미군은 5만8천여명, 남베트남군은 30만 명 이상, 베트남 민간인은 수십만 명이 각각 숨졌다. 미군을 돕기 위해 파병된 한국군도 5천99명의 사망·실종자를 냈다.
베트남 전문가인 이한우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초빙교수는 "베트남전은 기본적으로 남북통일을 추구하는 내전에 외부의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개입, 남북을 각각 지원한 국제전·이념전 성격도 가진 전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개혁·개방 거쳐 신흥공업국으로 고도성장
전쟁 종식으로 베트남은 1880년대 프랑스 식민지배 시작 이후 약 90년 만에 독립 통일 국가의 위상을 회복했다.
하지만 1978년 캄보디아, 1979년 중국과의 잇따른 전쟁에 따른 국방비 부담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 등으로 경제난에 시달리면서 빈곤국에 머물렀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기 어려워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한 난민('보트 피플')이 수십만 명에 달했고, 이 중 상당수가 바다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쇄신) 구호를 내건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외국 기업 유치 등에 힘입어 1990년대 이후 연 5∼9%의 고도성장을 이룩하며 대표적인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떠올랐다.
50년 전 1인당 국내총생산(GDP) 100달러 미만이었던 최빈국이 이제는 4천600달러 수준의 중진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2020∼2024년 주한 베트남 대사를 지낸 응우옌 부 뚱 베트남 외교아카데미 교수는 "50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은 전후 재건을 대부분 완료하고 전쟁 피해와 손실을 극복했다"면서 "세계 모든 국가, 특히 이웃 나라들과 우호적 관계를 누리는 국가로 고속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미국은 베트남전 실패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2차대전 승리 이후 황금기를 누리면서 미국 사회에 가득 찼던 풍요로움과 낙관주의는 참전 명분이 약한 전쟁에서 약소국에 졌다는 트라우마로 상당 부분 무너졌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1·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거둔 성과는 미국이 스스로를 자애롭고 '적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줬다"면서 "베트남은 그 신화를 잠재웠다"고 지적했다.
1964∼1973년 군인 총 32만여명을 파병한 한국도 전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참전으로 한국 정부와 기업, 참전 장병 등이 미국으로부터 얻은 외화 수입은 총 1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더불어 미국으로부터 약 1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극빈국에는 막대한 금액으로서 이후 한국 경제 성장의 마중물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트남전은 또 박정희 정권의 독재 체제 강화의 한 배경이 됐다.
이 교수는 "당시 정부는 베트남 통일을 공산 세력에 의한 적화로 보고 반공주의를 강화했다"면서 "반공 이념을 유신 선포와 같은 정권 보위, 권위주의 체제 지속의 도구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 미국·한국과도 손잡아…포괄적 전략동반자로
종전 이후 50년을 거치면서 베트남과 미국·한국은 전쟁의 앙금을 뒤로 하고 화해의 길을 걸었다.
베트남은 모든 외국, 특히 주요국과 우호 관계를 갖는다는 '대나무 외교' 기조하에 과거 적국이었던 미국과도 협력을 선택했다.
국경을 맞대고 전쟁까지 치른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종전 20년 만인 1995년 미국과 수교했다.
미국도 라이벌로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려고 베트남과 거리를 날로 좁혔다.
2000년 빌 클린턴, 2006년 버락 오바마 등 미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찾을 때마다 현지 서민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으며 베트남 국민들과 친근감을 쌓는 모습은 두 나라 화해의 상징이 됐다.
한국도 1992년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재개한 이후 베트남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을 이은 생산기지로 베트남을 선택, 현지 진출했다.
그 결과 한국은 작년 기준 베트남 누적 투자 규모 약 874억 달러(약 126조원)로 베트남의 최대 외국인 직접투자(FDI) 국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현지에 휴대전화·가전 등 생산공장을 지은 삼성전자의 경우 한때 베트남 전체 수출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는 등 베트남 최대 FDI 기업으로서 현지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인 2022년에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
뚱 교수는 "베트남은 미래지향적 접근, 효과적인 전방위 협력을 통해 과거 적대 국가들과 화해 과정을 진행해 왔다"면서 "모두와 우호 관계를 맺고 신뢰를 구축하려는 베트남의 전반적인 외교 정책에서 화해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 군경 1만3천명 퍼레이드 등 대규모 자축 준비…미국 외교관은 불참할 듯
베트남은 기념일 당일인 오는 30일 호찌민에서 군·공안 병력 등 1만3천여명이 참가하는 초대형 퍼레이드를 실시한다.
베트남 공군의 수호이(Su)-30MK2 전투기, 야크(Yak)-130 경전투기, Mi-8·Mi-17 헬기도 시범 비행을 벌인다.
중국·라오스·캄보디아 군대도 베트남 정부 초청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하며, 호찌민 시내 30곳에서 화려한 불꽃놀이도 열린다.
당국은 호찌민 중심가 곳곳에 20개의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TV·소셜미디어로 생중계해 현장에 가지 못한 국민도 관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최근 열린 퍼레이드 리허설 행사에도 이를 보려는 인파 수만 명이 길거리에 몰린 바 있어 행진 당일은 호찌민 전역이 거대한 축제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호찌민 외에 수도 하노이에서도 당일 불꽃놀이 등 행사를 열어 통일과 지난 수십년간의 고속 성장을 자축하며 국내외에 자신감을 드러낼 예정이다.
다만 최근 미국과의 관계는 이런 축제에 '악재'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베트남에 대해 지난 50년간의 화해 기조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마크 내퍼 주베트남 대사 등 자국 외교관들에게 이번 종전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말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국제개발처(USAID)의 폐지·대외 원조 중단으로 인해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 지원, 불발탄 제거 등 베트남전 피해 지원 사업도 중단됐다.
이에 대해 팜 투 항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24일 "4월 30일 기념행사는 용서·평화·화해·치유라는 불멸의 가치를 기리며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정신을 되새기는 기회"라면서 양국 관계의 강력한 발전이 두 나라 국민 이익에 부합하고 지역·세계의 평화·안정·협력에 기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jhpark@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