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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스키는 제가 가이드 러너였지만, 제 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김미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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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3년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88관왕 기록을 보유한 '스키여왕' 김나미가 은퇴 후 가이드 러너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뜻밖의 개인사를 털어놨다. 김 총장은 "사촌언니가 후천성 시각장애인이었어요. 엄청 총명했거든요. 시각장애에 대한 온 집안의 관심이 각별했죠. 미국 버클리대 유학 후, 서울맹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세 자매가 함께…. 한날한시에 세 딸을 잃은 이모부(고 정광진 변호사)는 삼윤장학재단을 만들어 서울맹학교를 후원했어요." 선수 시절 9번의 대수술도 장애에 대한 편견을 바꿔놨다. "운이 좋았을 뿐, 누구나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은퇴 직후 아침방송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 후 장애인스키 쪽에서 연락이 왔다. 김 총장은 "당시 장애인체육 현장은 정말 열악했어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장비도, 지원도 말도 안되게 부족했죠"라고 돌아봤다. 그러나 자신처럼 '겁 없는 후배' 김미정과의 만남은 축복이었다. 두 사람의 호흡은 완벽했다. "비장애인도 잘 못 내려오는 용평 블랙다이아몬드 슬로프를 둘이서 미친 듯이 내달렸어요. 가이드러너의 역할은 게이트에서 라인을 잡아주는 건데 선수와 호흡이 최고 중요해요. 미정이는 정말 잘 탔죠. 기문에 바짝 붙어타는 센스가 뛰어났어요. 미정이가 날 채근할 때도 있었어요. '언니! 빨리! 쏴! 쏴!' 했죠"라며 웃었다. "친자매 소리를 들을 만큼 서로 닮아갔어요. 비장애인도 내 폼을 따라하기 쉽지 않은데, 미정이는 내 폼을 따라오더라고요. 신기했죠."
나가노패럴림픽 4위는 그래서 더 아쉽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죠. 동메달과 정말 근소했어요. 우리의 첫 실전이었거든요. 국제대회에 한번만 나가봤어도 메달을 땄을 거예요. 돈이 없어 훈련도 충분히 못했죠. 용평스키장에서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있다'며 게이트를 얻어타기도 했어요"라고 돌아봤다. 옛 추억을 떠올리다말고 김 총장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미정이가 워낙 잘 타니까, 어린애들이 '진짜 시각장애인 맞냐'며 장갑을 꽂은 폴대를 눈앞에다 흔들어댔어요. 욕하면서 소리 지르다 속상해서 펑펑 울었죠. 미정이가 '언니 참아, 저런 사람 많아. 난 괜찮아' 오히려 날 달랬어요. 최고의 선수인 미정이가 그런 대접을 받는 현실이 너무 속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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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후에도 '용감무쌍' 두 여성의 동행은 계속됐다. 두 아들의 엄마가 된 김 총장과, 딸과 아들을 둔 김미정. 둘째 출산 직후, "둘째가 나와 같은 장애가 있는 것 같다"는 미정이의 전화, 둘은 수화기를 붙들고 통곡했다. "한번도 미정이를 시각장애 선수라 생각한 적 없어요. 내 동생이죠. 처음엔 재능기부하면 모양새가 좋겠단 생각도 했는데, 미정이와 훈련하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이라도 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온실 속 금수저로 88관왕 하고 콧대가 하늘을 찔렀던 내가, 미정이를 만나 달라졌어요. 미정이를 통해 인생이 바뀌었고, 배려와 감사를 배웠죠. 미정이가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줬어요." 김 총장은 단언했다. "나는 미정이의 스키 가이드 러너였지만, 내 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김미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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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40대, 엄마, 여성, 체육인의 삶을 버텨내며 유리천장에 도전하는 동안도 그녀들은 줄곧 함께였다. 체육인답게 화통했고 여전히 겁없이 도전했다. 김 총장은 대한장애인체육회 부회장, 평창2018 유치위원, 체육인재육성재단 사무총장, 국제바이애슬론연맹 아시아 여성 최초 3연임 부회장을 거쳐 대한체육회 105년 역사상 첫 여성 사무총장에 올랐다. 한국선수 첫 황연대성취상을 수상한 김미정은 여성 최초의 장애인골볼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다 2018년 평창패럴림픽 직후엔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 퀘벡으로 영어연수를 위해 떠나기도 했다. "폭설에 발이 푹푹 빠지는 캐나다에서 운전도 못하는 시각장애인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단 걸 깨달았던 때"라며 웃었다. 김 총장은 체육인재육성재단 해체의 아픔을 겪은 후 2018년 평창올림픽 직후 독일로 떠났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스포츠의 운명이 다시 그녀들을 같은 곳으로 이끌었다. 김미정은 귀국 후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선수촌 훈련기획부 주임으로 후배 선수들을 지원하고 있다. 김 총장은 체육계 유리천장을 깨고 금의환향했다. 다시 함께 달릴 미래를 꿈꾼다.
김 주임이 "언니와 함께 한국선수 최초로 받은 '황연대성취상'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게 좋은 곳에 기증하고 싶다"고 하자 김 총장이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쳤다. '기증식 때 27년 만에 가이드러너와 선수로 스키 시연도 해보면 재밌겠다'는 말에 선후배의 눈빛이 반짝였다. 김 주임이 말했다. "최근에 일하면서 의기소침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 언니를 만나 다시 용기를 얻었어요. 다시 힘을 내야겠어요. 언니와 같이, 여성 체육인, 행정가로서 장애-비장애인이 어울리는 스포츠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인터뷰가 아니라 시작점이라고 써주세요." 김 총장이 화답했다. "'우리의 스펙트럼은 넓고 우리의 그릇은 무궁무진하다.' 여성을 넘어 남녀, 장애-비장애, 청소년, 노인까지, 모두를 아우를 우리들의 스포츠를 기대해주세요!" 그녀들의 봄날은 다시 시작이다.
올림픽회관=전영지 기자